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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미리 쓰는 유서

정진홍
논설위원
# 사람이 태어나서 오는 순서는 있으되 죽어서 저세상으로 가는 순서는 딱히 없어 보인다. 오늘 영결식을 하는 세아제강 고(故) 이운형 회장의 경우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사람 일 알 수가 없다. 특히 이 회장의 경우 지난 토요일에 예술의전당에서 함께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려 했지만 그분의 출장일정 때문에 나와 다른 일행들만 보게 됐다. 결국 그는 공연 보려고 했던 날 출국을 했고 다음 날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저세상으로 가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이기도 했거니와 주변 사람 그 누구에게도 떠나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갔기에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애잔하고 먹먹해진다.

 # 며칠 전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고 이운형 회장의 빈소를 찾았을 때 늦은 오후임에도 조문객들이 붐벼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멀리 마주 보이는 영정의 웃는 모습이 마치 살아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평소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고향(평남 강서)인지라 누님이라 부르던 이 회장의 미망인 박의숙 여사가 함께 문상 간 아내를 껴안으며 참았던 눈물을 보이자 사내인 나 역시 애잔한 마음을 누를 길 없어 함께 껴안고 눈물을 삼켰다. 박 여사인들 남편이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저세상으로 갔다는 것이 믿어지겠나. 장례를 모두 치른 후에라도 마치 출장 다녀왔다는 듯이 문 열고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녀에게 가장 가슴 깊이 사무칠 일은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갔다는 것이리라. 박 여사의 평소 말투대로 “차라리 말 한마디 하고 갔으면 밉지는 않을 텐데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간 것이 너무나 야속하고 얄밉다”고 해야 할건가. 돈이 아무리 있으면 뭘 하고 자식이 아무리 많으면 뭘 하겠나. 또 제아무리 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조문하고 위로해줘도 살며 사랑하며 지지고 볶고 미워하고 싸우기도 했을 그 남편이란 존재가 어느 순간 말 한마디 없이 주검이 되어 왔을 때의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리며 그 무엇으로 메우랴.

 # 문상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혼자 조용히 상념에 잠겨 여러 해 전에 펴낸 책 『완벽에의 충동』 말미에 담았던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을 떠올렸다. 10년 전쯤 처음 ‘미리 쓰는 유서’를 써보았을 때는 10년 후쯤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참에 다시 한번 새로운 버전의 ‘미리 쓰는 유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가진 것이 많고 삶이 다채로운 이들에게는 유서가 자칫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나눠주느냐는 지분계산서일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나 살아온 삶의 단순 혹은 다채의 정도를 떠나서 정녕 미리 써야 할 유서에 반드시 담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아온 이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의 남김 없고 감춤 없는 표현이리라. 함께 살아오면서 잘못했지만 사과하지 못한 일, 아쉬웠지만 다하지 못한 채 감추고 삼켰던 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줘 고맙고 감사했다는 진심을 적어 놓아야만 할 것 같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나 다른 이에게는 몰라도 함께 살아온 이에게만큼은 말 한마디, 글 한 줄이라도 남기는 것이 옳다. 특히 부부의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거기엔 가까운 이들, 심지어 친자식도 다 알 수 없는 그 둘만의 뭔가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 시인 함민복은 그의 최근 시작(詩作)인 ‘비정한 길’이란 시에서 “…길은 유서/ 몸은 붓…”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 몸뚱이라는 이름의 붓은 갈지자든 똑바로든 인생길을 걸으며 삶 그 자체를 쓰고 그린다. 정녕 몸은 붓이고 인생길 위에 남겨진 삶의 흔적들은 그 자체로 ‘미리 쓰는 유서’가 되리라. 그리고 그 유서에 반드시 담아야 할 한마디는 이것이리라. “…비록 턱없이 부족할지라도… 그래도 나, 당신을 정녕 사랑했소….” 이제 그 한마디 쓰도록 살아보자.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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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