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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양카이후이와 마오신위

지난 3월초부터 개최된 양회(兩會)가 끝나가면서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의 윤곽이 들어 나고 있다. 이번 양회 기간 중에 중국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에 참석한 마오신위(毛新宇) 중국 인민해방군 소장(한국의 준장)은 “북한의 비핵화는 중국 인민의 염원”이라며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였다는 보도가 눈에 띈다. 신 중국 건국의 아버지인 마오쩌둥(毛澤東)의 손자로 금년 43세의 마오 소장의 북핵 관련 발언은 한반도의 안정을 원하는 중국 인민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6월 호남 제1사범을 졸업한 마오쩌둥은 베이징(北京)대학 윤리학 교수로 있는 은사 양창지(楊昌濟)를 찾아갔다. 양 교수는 호남 제1사범에서 가르치던 애제자 마오쩌둥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에게 베이징대학 도서관 임시사서로 근무케 하여 베이징대학의 많은 강의를 청강하도록 배려를 하였다.



양 교수는 애석하게도 베이징대학으로 옮긴지 2년 만인 1920년 병사하였다. 그의 가족은 고향 장사(長沙)로 내려와 양 교수의 장례를 치루었다. 은사의 장례를 도운 마오쩌둥은 양 교수의 외동딸인 양카이후이(楊開慧)와 결혼한다. 양카이후이는 공산당에 입당 마오쩌둥의 혁명 사업을 돕다가 1930년 국민당 군에 체포된다. 당시 국민당은 양카이후이에게 마오와의 결별을 종용하였으나 그녀는 “죽음은 애석하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윤지(마오의 아명)의 혁명이 성공되길 바랄 뿐이다(死不足惜 惟愿潤之革命早日成功)”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양카이후이의 나이 29세였다.



징강산(井崗山)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카이후이의 죽음은 내가 백번 죽더라도 속죄가 안 된다(開慧之死 百身莫贖)“ 며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신 중국 건국 후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가 태어난 빤창마을(板倉鄕)을 카이후이향(開慧鄕)으로 바꾸어 그녀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보답코자 하였다.



양카이후이는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아들이 안잉(岸英)(1922-1950), 둘째 안칭(岸靑)(1923-2007) 그리고 안룽(岸龍)(1927-1931)이다. 세 아들은 어린 나이로 어머니가 죽은 후 상하이에서 떠돌아다니면서 국민당 비밀경찰의 감시와 폭행에 시달렸다. 안칭은 이때 두뇌에 상처를 입어 평생 회복되지 못하였고 안룽은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안잉 안칭 형제는 중국 공산당의 주선으로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 가 1947년에 귀국하였다.



안잉은 신혼시절인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戰死)한다. 안칭은 1960년에 결혼하여 처음 태어 난 아들이 마오 소장이다. 그는 런민(人民)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입대하여 최연소 장군이 되었고 마오쩌둥 사상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마오 소장은 현재 1남 1녀를 두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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