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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핵전쟁’의 위협과 위기 앞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북한의 핵전쟁 위협이 가중되고 있다. 북한은 끝내 남북불가침 합의 전면 폐기와 정전협정 백지화까지 들고 나왔다. 종전 이후 두 세대나 지난 21세기에 맞는 정전협정 폐기 주장과 핵전쟁 위협은 한반도 문제를 관리해온 두 국제 기둥인 ‘정전체제’와 ‘북핵체제’가 심각하게 파열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한반도는 지금 세계에서 핵전쟁 위기가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1950년 중국군 참전 직후의 핵전쟁 위기 이후 두 번째다. 1950~53년 미증유의 대참화로부터 한국인들은 대체 평화와 생명을 위해 무엇을 배웠길래, 탈냉전·세계화와 민주화 한 세대를 경과한 지금에도 평화 정착은커녕 거꾸로 핵전쟁 위기에 다시 직면했는가.



 미국(과 일본·남한)의 (핵)공격 위협 때문에 핵무장을 추진하며, 핵이 없었다면 이미 침략당했을 것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북한은 핵이 없었던 시기에도 미국(과 남한)으로부터 군사침략을 받지 않았다. 특히 사회주의 붕괴로 북한이 고립되었을 때조차 미국(과 남한)은 북한을 공격하는 대신 관여를 통해 포용하려 노력했다. 오히려 북한 핵무장이 군사긴장과 전쟁 위기를 고조시켜왔다는 점이 진실에 더 가깝다.



 북핵 문제는 이제 근본 요체를 돌아볼 때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전쟁 방지, 비핵화, 남북관계 개선,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과 보편국가로의 진화,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지속된 북핵 문제의 심연에는 사회주의 해체 이후 북한의 고립과 체제붕괴 위기가 놓여있다. 1950년 6월 30일 이후 계속된 세계 최강 미국의 세계 최장 봉쇄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북 국력 격차 심화와 흡수통일 가능성의 제고 역시 체제 수호를 위한 최후수단으로서의 핵무장 유혹을 강화시켰다. 결국 ‘핵무장=체제수호’라는 등식의 분리가 문제 해결의 요체인 것이다.



 그럴 때,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은 적대국가 소련·중국·동독·베트남과의 문제 해결 과정을 정밀하게 반추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1)미국과 전쟁을 치렀거나 2)핵을 보유했거나 3)분단국가들이었다는 점에서 각각 북한·북핵 문제와의 일치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의 요체는 이들이 북한과 공유하는 미국과의 전쟁 경험, 핵 보유, 분단문제(적대와 동맹)가 아닌 다른 데에 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이들과 북한이 다른 점은 바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여부였다. 우크라이나·남아프리카공화국·리비아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소정책과 미·소 대결 완화-개혁개방-소련 붕괴, 미·중 관계 정상화와 중국의 개혁개방,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미-베트남 관계 개선 및 미·중 대결에의 활용, 동독 문제 해결과 독일 통일…의 과정을 면밀하게 복기하여 북한·북핵 문제 해결에 참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중국과 베트남은, 전면전쟁을 치른 국가들이었음에도 미국은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고 한 세대 안에 관계 정상화를 이뤘다. 특히 미-대만 관계를 다치지 않으면서 성공시킨 미·중 국교정상화는 한·미-북·미-남북 3자 관계에 시사하는 바 정녕 크다.



 그러나 북한과는 두 세대 동안 적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한·중, 한·소 수교 20년이 넘도록 북·미, 북·일 수교를 못하고 있는 현실은, 국제관계 개선 실패가 초래하고 있는 북핵·북한·한반도 문제 악화의 국제적 지반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탈냉전 이후 핵실험 이전의 북한이 과연 소련·중국·동독·베트남보다 더 위협적이었는지, 또 그 절호의 시기 동안 평양에 미국·일본·한국 대표부를, 반대로 서울·워싱턴·도쿄에 북한의 그것들을 설치하지 못한 우리의 지혜와 전략은 최선이었는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현금의 시점에서 무겁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시기로부터 가려 배워야 할 북한문제 접근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대화와 결기, 평화와 안보, 미국과 북한, 미시와 거시, 민족적 접근과 국제적 접근의 결합일 것이다. 1960년대에 집중된 북한의 군사 공세, 즉 4대 군사노선, 청와대 습격 기도, 울진삼척 무장침투,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첨예해진 안보위기 속에서도 박정희는 정면 군사대응을 우회하며 남북관계의 지반 자체의 변혁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남북 국력을 최초로 역전시킨 이후 비로소 평화통일선언(1970), 적십자회담 제안(1971), 7·4공동성명(1972), 6·23평화통일외교선언(73)을 적극 추진하며 북한을 견인해냈다.



 첨예한 전쟁위기 앞에서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 국제사회는 소련·중국·동독·베트남의 사례들로부터 배워, 적극적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을 견인하며, 또 남한은 정면 군사대응을 우회하여 전쟁을 방지한 이후 평화와 통일의 대도를 안출하기를 기원해본다.



박 명 림 연세대 교수·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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