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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와 건축가 운명처럼 만나 ‘작은 우주’ 만들다

1 남쪽에 15층 아파트 다섯 동이 지어지면서 10여m 절개지 위에 남겨졌다. 2 3층 앞마당과 벽에 뚫린 창. 3 2층 중앙의 식당. 하루의 일과 중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집은 자기만의 우주다. 내밀한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캔버스이기도 하다. 시선은 밖을 보지만 보여지는 것은 자기일 수밖에 없다. 단독 주택은 이러한 안과 밖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이루어내는 합주곡이다. 가족과 가족 간의 추억까지 더해지면 풍요로운 교향곡이 된다.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보고 보여지고, 만지고 만져지고, 느끼고 느껴지는 대상으로서의 집은 그렇기 때문에 건축의 꽃이다.

최명철의 집을 생각하다 <17> 서울 방배동 H씨 댁

이런 단독주택 설계를 의뢰받을 때 늘상 건축가는 고민한다. 잘 아는 사람이 의뢰인인 경우는 마치 친구 간 돈거래처럼 화들짝 피하기도 한다.

20세기 초 호황이던 미국에서 잘나가던 루이스 설리번은 주택 의뢰가 들어오면 초짜이면서 고집 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시켜 회사의 중요한 고객(혹은 고객의 부인)을 만족시켰다. 도전적인 시절의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반데로에는 역사에 남은 주택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판스워드 하우스(Farnsworth house)’를 건축했지만 건축주와 소송까지 이어지는 곤욕을 치르고서야 작품으로 남았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는 TV 만화영화 속 톰과 제리처럼 평생 앙숙이지만, 동전의 앞뒷면처럼 둘이 있어야 롱런하는 역설적인 관계다.

톰과 제리 같은, 동전 양면 같은 관계
서울 방배동 H씨 댁은 서래마을 언덕 서측 가로변에 있다. 서래마을은 프랑스 학교가 세워진 이래 꾸준히 새로워지면서 서리풀공원 주변과 함께 내외국인 모두가 선호하는 주거지로 각광받고 있다. 건축주 H씨는 이십여 년 전 이곳에 새 집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아온 토박이다.
그런데 2006년 멀쩡하던 남향집 앞에 단독주택 재개발사업으로 15층 아파트 다섯 동이 지어지면서 십여 미터 절개지 위에 남겨졌다. 더구나 바로 옆집마저 허물고 연립주택 공사가 시작된 순간 이곳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어처구니없는 세월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 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새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4 2층 마당. 상식적인 마당 조경을 거부하고 중정(中庭)용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어 오브제화한 구성 또한 둘이서 쉽게 합의한 내용이다. 사진 윤준환
하지만 ‘자기만의 우주’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건축가를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친형이 경영하는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2년 가까이 여러 명의 건축가를 만났고 수많은 설계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속에 마지막으로 소개받은 건축가 조남호(솔토건축)와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 기존 안을 발전시키던 중 자기 생각이라고 가져온 스케치에 꽂혀 묵은 체증이 확 풀리듯 일주일 만에 설계도면을 확정했다. 이거였다!

길에서 보이는 하얀 돌담과 무표정한 백색 상자형 집은 마치 갤러리 같은 모습이다. 서래마을에 있는 풍부한 외관의 주택들과는 차별화된 풍경이다. 지붕이 없는 출입문을 들어서 기둥으로 뻥 뚫린 필로티(pilloti) 공간을 마주하는 순간 남의 집이라는 의식은 사라지고 자유로운 풍경에 편안해진다. 그 속에 조그만 로비 같은 1층 현관은 품격이 있고 마주한 계단으로 오르면 미닫이 칸막이 앞으로 회의실 같은 모습의 식당이 나타난다.

이 집의 중심은 거실이 아니라 식당이다. 안주인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식탁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며, 손님맞이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3층의 커다란 중정은 남쪽의 아파트 그늘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빛을 담는다. 2층 높이의 백색 상자는 남측의 아파트와 서측의 4층 빌라로부터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막으면서 1층은 필로티로 들어올려 그들과 대응한다. 1층은 홀과 창고 등 최소한의 공간으로만 구성되고 대부분은 주차장과 데크로 비워져 있다. 이곳에 상식적인 마당 조경을 거부하고 중정용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심어 오브제화한 구성 또한 둘이서 쉽게 합의한 내용이다.

마치 초기 모더니즘 건축을 맞닥뜨린 것처럼 외관에서 느꼈던 심플함이 집안 곳곳에 배어 있다. 최소한의 구조체 외에는 가변성 있는 경골 목구조를 사용했다. 벽체나 천장의 마감 또한 일반적인 벽지마감이 아닌 친환경 페인트 마감이어서 새삼 건축주와 맞아떨어진 건축가의 차분한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 군더더기를 배제한 민낯의 공간들은 살아갈 사람들의 눈길과 손길에 따라 세월을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집이 완성되어 살게 되면서 밖에 외출했다가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는 건축주, 가족들과 같이 가기로 한 해외여행도 마다하고 혼자 남아서 이 집의 풍취를 즐겼다는 집주인……. 정말 르네상스 시절의 레전드인 메디치 가문과 미켈란젤로의 이야기 같은 만남이 방배동에서도 이루어졌다.

뻘쭘하게 솟은 아파트는 이제 그만
요즈음 단독주택이 살아나고 있다. 개성을 존중하는 30~40대 부부들은 일찌감치 식상한 아파트를 거부하고 이곳저곳 살고 싶은 동네를 찾아 자기 집 짓기에 나서고 있다. 마침 일부 의식 있는 건축가들은 공동 홍보를 통해 좋은 건축주들과의 만남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자발적인 움직임들은 매우 바람직하고 향후 우리나라 집의 미래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들을 위해서는 도시 내 좋은 동네, 좋은 땅의 공급은 필수적이다.

멀쩡한 단독주택지들을 노후 주거지라고 선을 그어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고 부추기고 이웃 간의 갈등마저 야기한 잘못된 도시 행정은 멈춰져야 한다.
고요한 단독주택지 속에 뻘쭘하게 솟아 있는 아파트의 풍경은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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