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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19)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의 판교집

1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의 판교집 외관. 희고 간결하고 비례가 딱딱 맞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의 앰프를 보는 듯하다.
2 1층 어머니방에 둔 빈티지 TV. 이탈리아 회사 포놀라에서 1956년 디자인한 ‘모델 1718’ 제품이다.

단순·유쾌·고요한 질감과 결
방마다 바닥 높이 달라 리드미컬





“인테리어 디자이너란 ‘공기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게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56·소갤러리 대표)의 정의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면 우선은 그곳의 빛깔과 형태를 보지만 곧 물성이 지닌 질감과 결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그 질감과 결이 만드는 공기감을 감지하게 되거든요. 인테리어란 바로 그 공기감을 디자인하는 겁니다.” 경기도 판교신도시 마영범의 집은 디자인 명품들의 전시장 같았다.



조지 나카시마의 테이블 앞에 핀 율과 찰스 레이 임스의 의자를 놓았고 소반 위엔 이사무 노구치의 조명등을 두고 말간 장판 위엔 어느 절에서 구했다는 큼직하고 어수룩한 목어를 앉혔다. 벽과 바닥과 천장은 대개 밝고 희다. 그런 방안이 만들어내는 ‘공기감’을 어떻게 설명할까. 단순하고 유쾌하고 고요하다.



글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3 마영범이 입식 거실에 놓인 옌스 퀴스트가트의 사파리 의자에 앉아있다. 뒤에 보이는 벽은 설치미술가 홍동희의 작품으로 밤나무를 잘라 붙인 것이다. 앞 벽에 걸린 부채는 잉고 마우러의 조명등이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다’란 말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쓰는 일상용품이 곧 그 사람입니다. 일상은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물건을 선별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문화가 형성된다고 생각해요. 일상용품에 미학을 집어넣을 줄 아는 것이 문화예요. 우리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마영범의 집에 있는 물건들, 소문난 의자와 테이블과 조명등과 오디오는 그의 사치가 아니라 그의 공부다. 한 달에 책 10권을 읽고 CD 20장을 듣는다고 소문난 문화 탐식도 실은 문화가 아니라 실용이다.



4 집의 중심에 놓인 부엌과 식탁. 밝은 빛깔의 조명등이 유쾌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좌식과 입식 두 개의 거실이 나타난다.
5 머리칼이 쭈뼛할 정도의 엄청난 소리를 내는 지하음악실. CD를 보관하는 장이 독특하고 기능적이다. 벽에 진열해둔 것은 카약. 형태미가 완벽해 걸어뒀단다.
6 천장 높은 서재. 디자인 관련 책보다 인문학 서적이 더 많다.
“최고를 경험하지 않으면 고객에게 아무것도 제안할 수 없어요. 나는 부자가 아니에요. 내가 돈 버는 데 관심이나 있었겠어요. 그동안 이베이와 옥션을 뒤지며 물건 사들이기에 바빴지. 대신 미의 극단까지 가봤다고 자신합니다. 극단까지 가봐야 그것의 허망을 알 수 있거든요.”



마영범을 두 번 만나 여덟 시간을 얘기했다. 그는 솔직하고 무구한 태도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을 천의무봉하게 쏟아냈다. 깨달음과 공부와 경험이 범람하는 마영범이란 강줄기 앞에서 나는 여러 번 눈이 부셨고 그건 인터뷰어에겐 좋지 않은 징후였다. 인터뷰는 대상을 편안하게 마주 봐야 한다. 그래야 그의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 외경을 품고 올려다보기 시작하면 상대를 판독할 수가 없다.



아무튼 나는 마영범을 만나고 돌아온 후 한동안 그에게서 들은 아티스트의 이름들을 검색하기에 바빴다. 한스 베그너, 폴 키에르홀름, 아르네 야콥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포난 세티, 지노 사파티, 잉고 마우러, 찰스 레이 임스, 와이 카미, 스틸 노보, 핀 율, 디터 람스, 이사무 노구치! 멀고 낯설어 별 같고 그들이 만든 작품이 빛나서 또한 별이 된 이름들이었다.



그는 스스로 압구정동 오렌지족 1세대라고 말한다. 대학에선 서양화를 전공했고 잠깐 미술 선생 노릇도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의 매장을 꾸며주면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된다. “25년 넘게 이 바닥에서 일했어요. 그러면서 예쁜 것이 헛것임을 알게 됐죠. 얄팍하고 허망한 것이죠. 인테리어는 아무리 훌륭해도 2∼3년이면 제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거든요.” 그동안 압구정동·청담동 일대 카페·레스토랑을 200개 넘게 디자인했지만 남아 있는 건 별로 많지 않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빛나는 디터 람스 같은 디자이너도 있는데. 나도 지속 가능한 것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아들에게 금방 사라지는 것을 만드는 아버지로 남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그가 최근 자신과 가족이 생활할 살림집 전체를 직접 설계해 새로 지었다. 20년 넘게 남의 공간의 ‘공기감’을 디자인하던 이가 자신의 공간을 만들었다니 마영범의 판교집 구경은 설렐 수밖에 없다. 대지 248㎡(75평)에 1층 116㎡(35평), 2층 83㎡(25평), 실내는 방마다 바닥 높이가 달라 리드미컬하고 바깥을 내다보는 시점이 매번 바뀌는 재미가 있다.



방은 모두 아홉 개. 그 방을 일일이 보여주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판이다. 지하에 부부 침실과 드레스룸과 음악실을 두었고, 1층엔 거실 둘과 부엌과 어머니방 하나를 놓고, 2층에 복도를 사이에 두고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 방을 제각기 뒀는데 여기 특별한 공간 하나를 숨겨 뒀다. “굳이 말하자면 명상실 같은 거예요. 일부러 아들놈 방과 연결되게 만들었어요. 녀석이 나중에 내 방 밖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명상실이 있었지. 아버지는 거기 즐겨 앉아 계셨어! 식으로 기억해주기를 기대하는 거지요.”



집은 부엌과 식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는데 공간마다 레벨이 다 다르다. 오른편엔 의자가 놓인 입식 거실과 거기서 한 단을 올라서면 나오는 좌식 거실이 있다. 왼편엔 바닥에서 여섯 계단을 올라서서 천장 높은 열린 서재가 있고 서재에 이어지는 방이 있다. 장남인 그가 언젠가는 모시게 될 어머니 방인 그곳은 심플하지만 아름다운 물건들로 가득 찼다. 존 레넌의 흑백 사진과 조지 나카시마 책상, 영화 ‘졸업’에 나온 클레어톤 오디오에 잉고 마우러의 조명등까지!



7 조지 나카시마의 책상과 의자가 놓인 어머니방. 책상 맞은편의 오디오는 영화 ‘졸업’에 등장했던 ‘클레어톤’으로 마영범이 특히 사랑하는 물건이다. 8 네 벽을 바깥과 완전히 단절하고 천장에 둥근 창만 뚫어놓은 명상실. 투명한 의자는 그의 중학생 딸이 특별히 좋아하는 이에로 아르니오 버블 의자로, 공중에 매달아 사용한다.






거기서 지하로 몇 걸음 내려가면 부부의 침실, 맞은편엔 드레스 룸, 다시 몇 단 내려가면 이 집에서 가장 너른 공간인 음악실이 나온다. 여기서 나는 진정 전율할 만한 소리를 들었다.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는 경험이었다. 다섯 개의 스피커에서 나온 송광사 새벽 예불 북소리가 바닷속에 잠긴 듯 세포막을 뚫고 들어오며 출렁거렸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나무 벽면에는 레이저로 글자를 새겼다. 나란히 쓰인 글귀는 성경과 장자에서 따왔다. “아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요. 이쪽은 히브리어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쪽 한자는 ‘천지창창 기정색야(天之蒼蒼 其正色耶)’입니다. 장자 ‘소요유’편 맨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죠. 뜻은 ‘하늘은 푸르디 푸른데 정말 푸른색일까’예요. 우리가 지닌 기존의 인식·지식·가치·관념을 걷어내라는 겁니다.”



9 태국에서 가져온 전당포 벽면. 현관과 부엌 사이에 놓아두고 그릇을 수납한다.
내 눈에 마영범의 집은 전체가 단정한 오디오 같다. 바람 불거나 비 내리면 음악 한줄기가 흘러나올 듯하다. 방마다 오디오 시스템이, 그것도 매니어들이 환장할 명품들로 그득하기 때문인가. 나는 나중에야 답을 알았다. 그 집은 바로 디터 람스의 변형이었다. 2층 명상실 외벽을 적동 구리판으로 씌우고 군더더기를 싹 지운 외관을 바라보자 느낌은 더욱 선명해졌다. “디터 람스 앰프는 어떤 주거환경에도 어울리도록 백색으로 칠하고 모듈화시켰어요. 비례가 딱딱 맞죠. 디자인에선 비례를 갖고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비례를 갖는다는 것은 본질을 갖는 거거든요.”



내가 상쾌하게 느낀 것은 그러고 보니 마영범의 비례였나보다. 이왕 집을 지어봤고 비례에도 통달한 듯하니 다른 사람 집을 지어주는 건 어떨까. “건축은 아무나 할 일이 아니에요. 집 지으면서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집 짓는 데 선택해야 하는 자재가 아마 1000가지도 넘을 걸요. 그걸 물성에 따라, 빛깔에 따라, 용도에 따라 조화를 고민하며 결정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긴장을 무슨 수로 견딥니까.”



그의 집에 놓인 디자인 역사상 최고로 평가받는, 떠르르한 족보를 가진 오디오·조명등·의자·테이블은 대개 1950년대에 생산된 것이다. 그가 권하는 대로 이런저런 의자에도 앉아본다. 조지 나카시마 의자는 과연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고 자노티 의자는 눈이 저절로 하늘을 쳐다보게 목의 각도가 조절되고 핀율 의자는 등받이에서 팔걸이로 내려오는 곡선이 기막히게 부드럽다.



현관엔 십자가 아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이 투과하는 대리석을 붙였다. 그저 신을 벗는 장소가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공간이란 이미지를 주고 싶어서다. 부엌 입구엔 태국 전당포의 벽면을 그대로 옮겨와 가림막으로 쓴다. 돈을 주고받는 창구와 유리 진열장이 초록 창살과 함께 이 집만의 독특한 공기감을 만들고 있다.



그는 요즘 거문고를 배우고 있다. 거문고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다. 나전·옻칠·소목 같은 전통공예 장인들과 함께 일했던 그는 앞으로도 더 많은 장인과 협업하려 한다. “지금껏 전시회를 위한 협업이었다면 이젠 일상에서 사용 가능한 물건을 만들려고 해요. 대중의 삶에 널리 쓰이는 물건에 미학을 집어넣을 겁니다. 가능성이 무궁해요. 세계 최고를 만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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