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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진흥으로 경제위기 돌파한 ‘마도로스’ 총리

마도로스 모자를 쓴 서독의 슈미트 총리(왼쪽)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주석이 동베를린에서 정상회담 후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77년 10월 18일 1시12분, 헬무트 슈미트 총리(1974~82년)는 상황실에서 군사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아랍 테러리스트가 독일의 민항기 루프트한자를 납치한 것을 강제 진압하는 작전이었다. 독일 정부는 특공대를 투입해 민간인 191명을 무사히 구출해 냈다. 슈미트는 “테러리스트 3명 사살, 아군 1명 경상뿐”이라는 보고를 들었다. 그 순간 강인한 표정의 총리도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야당 지도자인 헬무트 콜까지 전화를 걸어 축하했다. 슈미트는 이 사건을 통해 독일이 테러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걸 실력으로 보여 줬다.

‘행복한 경제강국’ 독일의 리더십 해부 ⑤ 헬무트 슈미트

슈미트는 이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야당에도 주요 진행사항을 수시로 통보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철학에서다. 훗날 슈미트는 회고록 정치와 권력에서 “만약 일이 잘못되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날 걸 각오했다”고 밝혔다. 당시 작전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슈미트가 얼마나 단호하고 냉정한지를 보여 줬다. 그는 위기의 해결사로 국민에게 각인됐다.

당시 독일에선 테러사건이 잇따랐다. 소련과 동독의 지원을 받는 적군파(RAF)들이 서독의 요인들을 납치해 암살했다. 대표적인 게 77년 9월 독일경영자대표인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사건이다. 납치범들은 독일 감옥에 갇힌 테러범 8명을 석방하고, 그들에게 10만 마르크씩 줘 북한이나 쿠바로 갈 수 있도록 특별기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슈미트는 75년 3월 야당 정치인 페터 로렌츠가 납치되자 테러 위협에 굴복해 수감된 테러리스트들을 석방해 준 적이 있었다. 이후 인명을 뺏는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슈미트는 테러범에 대한 관용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슐라이어 사건 당시 슈미트는 그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독일 특공대가 루프트한자 납치범을 소탕한 직후 슐라이어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테러범들은 독일 DPA통신에 전화를 걸어 슐라이어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줬다. 그는 머리와 가슴에 세 발의 총을 맞았다.

1993년 5월 21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슈미트 전 총리의 예방을 받고 대화하고 있다.
헬싱키 회의와 동독 지원 통해 통일의 길
슈미트가 총리를 넘겨받았을 때 독일 경제는 좋지 않았다. 성장률이 2%대로 낮아지고, 실업률은 당시로선 ‘살인적인’ 5%대를 기록했다. 대규모 경기부양책 때문에 재정적자 폭도 커졌다. 제1차 오일쇼크는 경제난을 가중시켰다. 슈미트 총리는 통상외교와 다자간 협력을 통해 경제 살리기에 올인했다. 독일 경제의 핵심은 수출이라는 판단에서다. 먼저 그는 자국 보호주의를 막기 위해 주요 6개국(G6) 회의(76년 캐나다 합류 이후 G7 회의로 개편)를 제안했다. 미·독·영·프랑스·이탈리아·일본 정상이 참석하는 회의였다. 첫 회의는 75년 11월 프랑스 랑부예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6개국 정상은 “보호주의 철폐와 환율 안정에 노력한다”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슈미트가 경제난 극복을 위해 추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환율 안정이었다. 미 달러화는 물론 유럽 각국의 환율과 연결된 마르크화 가치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서방에선 44년 이후 미국이 주도한 ‘브레턴우즈’체제의 고정환율제가 폐지되고 73년부터 변동환율제가 도입됐다. 슈미트는 유럽 국가들의 통화가치 균형을 유지하는 공동 변동환율 시스템을 제안해 관철시켰다. 복수 통화 간의 등락 폭을 2.5% 이내로 제한해 그래프상에서 등락의 움직임이 마치 ‘뱀(snake)’이 기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스네이크 시스템’이라고 불렸다. 영국을 뺀 유럽 대다수 국가가 참여한 이유는 외환 투기를 막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미국·동구권에 대해 서유럽의 단합을 과시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토대로 유럽통화체제(EMC)가 도입되고, 92년 유럽단일통화 ‘유로’가 탄생하는 초석이 됐다. 세계 경제위기의 파고 속에서 독일이 마도로스(선장)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70년대 중반 독일도 실업 증가와 고금리에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물가상승)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당시 슈미트가 내린 결론은 “5%의 물가상승보다 5%의 실업률을 견디는 게 더 낫다”는 것이었다. 독일은 30년 바이마르공화국 때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지폐 더미를 불쏘시개’로 사용할 정도로 큰 고통을 받았다. 그 결과 나치즘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뼈아픈 과거를 겪어야 했다. 슈미트는 물가안정과 성장 촉진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 수출 증대라고 믿었다. 독일은 수출진흥책이 주효해 77년 433억 마르크의 무역흑자를 달성했다. 이는 마르크화 강세로 이어졌고, 원유·원자재 수입단가를 낮춰 물가안정에 기여했다. 독일의 무역흑자는 대부분 산유국들과의 교역에서 창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80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인 폴 볼커가 ‘강한 달러’ 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수입 원유를 달러화로 결제해야 하는 독일으로선 강펀치를 얻어맞게 됐다.

슈미트는 빌리 브란트 총리처럼 거창한 비전을 내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서 데탕트를 통해 유럽 전역의 평화질서가 확산돼야 한다는 믿음은 훨씬 강했다. 75년 체결된 헬싱키협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는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준 외교무대였다. 유럽 35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 슈미트는 ‘바스켓 3’, 즉 이동의 자유, 동서 간 커뮤니케이션 자유, 인권 보장을 주장했다. 소련도 이 문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 동독과 동유럽 국가의 인권운동 그룹들의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슈미트는 “75년 헬싱키 회의는 동서 데탕트의 정점이었는데 80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고 회고했다. 슈미트는 유럽과 제3세계 민주화에도 관심이 컸다. 내각에 개발원조부를 만들고 스페인·그리스의 민주화를 지원했다.

슈미트는 전임자인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소련의 최고 권력자인 브레즈네프와 동독의 실력자 호네커와는 정중한 관계를 유지했다. 동·서독은 물론 서독·소련 정상회담도 개최했다. 74년 5월 본과 동베를린에선 동·서독 상주대표부가 업무를 시작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여행자 수는 73년 230만 명으로 늘어났다. 동·서 베를린 방문은 380만 건을 넘었다. 동독을 방문하려면 각자 20마르크를 반드시 바꿔야 한다는 동독 정권의 요구도 수용했다. 동·서독 마르크 환율도 암시장에서 1대 14까지 올랐지만 1대 1로 교환해 줬다. 동독에 대한 무이자 신용대출을 허용해 75∼80년 8억5000만 마르크를 빌려 줬다. 공산독재체제에 대항해 싸운 동독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차관을 제공하는가 하면 동독 고속도로에 대한 연간 운행료를 5억 마르크나 지불했다. 동독의 인프라 건설을 통해 동·서독 주민들이 상호 교류하고 방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먼 훗날 동·서독 통일을 위해서였다. 야당은 ‘결국 동독 정권을 지원하는 셈’이라며 비판했지만 사민당은 연방의회 총선에서 기민당을 두 번이나 눌렀다.

94세 노익장 과시, 언론인으로 제2인생
슈미트는 동방정책을 펼치는 한편 국가 안보에 대해선 확고한 자세를 보여 줬다. ‘이중결정’이 대표적이다. 79년 프랑스 과들루프에서 미·영·프·독 정상들이 만났다. 독일 총리가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좌석에 앉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었다. 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대한 서방의 공동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독일에 퍼싱·크루즈미사일을 재배치한다는 ‘재무장’을 결정했다. 슈미트는 이를 수용했다. 만약 소련이 SS-20 핵미사일을 감축한다면 독일도 핵미사일 재무장을 재고할 수 있다는 협상, 즉 이중결정과 연계시켰다.

그러나 ‘재무장’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민감하고 큰 저항을 불러올지 슈미트 총리는 간과했다. 소속 당인 사민당의 좌파와 시민단체들이 ‘평화운동’을 기치로 거리로 나섰다. 독일 녹색당이 결성되는 계기였다. 초강대국인 미·소 간 핵무기 협상에서 슈미트의 자리는 없었다. 단지 중재자 역할만 가능했다. 이를 두고 미·소 두 나라는 “슈미트가 통역에 충실했다”고 평가했다. 국방부 장관 3년, 재경부 장관 2년, 총리 8년 등 공직생활 13년 동안 슈미트 총리는 지쳐가고 있었다. 소연정 파트너인 자민당과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높아지자 총리는 ‘부자증세’를 주장했고, 자민당은 어떤 세금 인상에도 반대했다. 자민당 총재이자 외무부 장관인 한스 겐셔는 야당인 기민당 총재 헬무트 콜 총재와 뻔질나게 만나고 있었다. 드디어 82년 1월 1일 기민당과 자민당은 연방의회에서 슈미트 총리를 불신임하고 후임자로 헬무트 콜을 뽑았다. 사민당이 마련한 조촐한 행사 때 슈미트는 마도로스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횃불 행진을 지켜봤다.

슈미트는 정계 은퇴 후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언론인으로 변신해 집필활동에 전념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독일의 고급지 ‘디 차이트’의 공동발행인이다. 2012년 여론조사기관인 ‘포르자’는 ‘당신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은 누군가’란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응답자 중 76%가 슈미트 전 총리를 꼽을 만큼 그의 인기는 높다. 그는 60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데 이어 93년 전직 국가수반회의 명예회장 자격으로 다시 방한했다. 또 ‘독일국가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94세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1 콘라트 아데나워(기민당)
건국의 아버지, 현실주의 리더십
2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기민당)
낙관주의 리더십, 라인 강 기적의 주역
3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기민당)
중재 리더십, 대연정 실현
4 빌리 브란트(사민당)
비전 리더십, 동방정책
5 헬무트 슈미트(사민당)
마도로스(선장) 리더십, 복지국가 정비
6 헬무트 콜(기민당)
동물적 본능의 리더십, 동서독 통일
7 게르하르트 슈뢰더(사민당)
스마트 리더십, 사회·경제 개혁
8 앙겔라 메르켈(기민당)
뚝심·기다림의 리더십, 유럽 중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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