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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미친 일제의 마지막 발악 ‘히노마루벤토’

불나비처럼 뛰어내리는 가미카제 특공대. 일본의 전쟁 기계들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일본은 물론 식민지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사진가 권태균]
‘히노마루벤토(日の丸弁当)’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면 ‘일장기 도시락’쯤 될 것이다. 매실장아찌(우메보시) 하나를 도시락 한가운데 박아놓으면 일장기(日章旗)가 되는데 점심때쯤이면 장아찌의 붉은색이 번져나가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처럼 보이는 것이다. 일본은 물론 식민지 한국의 학생들도 일제 말기 ‘히노마루벤토’를 싸오라고 강요받았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⑨ 무너지는 파시즘 제국

그런데 이는 민간단체의 주장이 아니다. 1939년 8월 8일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驥一郞) 내각에서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차원에서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로 정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모든 국민에게도 국 하나와 반찬 한 가지만 먹는 ‘일즙일채(一汁一菜)’를 요구했다.

남자의 장발을 금지시키고 여성의 파마도 금지시켰다. 어린 학생들은 파마를 한 여성이 지나가면 둘러싸고 ‘파마에 불이 붙으면 금방 대머리~’따위 노래를 부르면서 놀려댔다. 영어 추방운동도 전개해서 ‘미식축구는 갑옷을 입고 하는 구기라는 뜻의 개구(鎧球), 파마는 전발(電髮), 페니실린은 벽소(碧素)’ 등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전국의 댄스홀까지 모두 폐쇄시켜 온 나라를 엄숙한 군국주의로 몰고 갔다.

그러나 학생들의 도시락에 매실장아찌를 박는다고 일본군이 전투에서 승리해 욱일승천기를 휘날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즙일채 권장은 역으로 그만큼 물자가 부족하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1940년 일본인들의 신년 인사는 “넉넉합니까?”였다고 『중앙공론(中央公論)』 1940년 1월호는 전하고 있다. 한두 달이면 끝낼 수 있다던 중일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주가는 폭락했고, 1939년의 큰 가뭄으로 일본 서부와 한국·대만의 쌀 수확마저 줄어들었다.

과달카날 전투(1942년 8월~1943년 3월) 때 파괴된 일본 군함.
박춘금 “조선도 지원병 가게 해달라”
본토 일본인들의 불만이 높아가자 일제는 식민지 백성들을 쥐어짜서 불만을 달래야 했다. 1939년 11월의 곡식 강제매입제도, 즉 공출(供出)이 그것이다. 공출이란 곡식 등의 생필품을 총독부에서 강제로 헐값에 매입해 일본으로 보내는 제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탈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은 공출까지 겹쳐서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동아일보』 1940년 7월 14일자는 ‘읍·면장의 증명 있어야 보리방아를 찧는다-수확의 4할은 공출하라-’는 기사를 경기도 안성(安城)발로 보도했다. 당국에서 공출에 필요하다면서 안성읍촌 정미소의 30여 대 보리방아를 일제히 정지시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굶는 농가가 속출해 ‘읍·면장의 증명서를 가져오는 농가에 한해 보리방아를 찧게 허용한다’는 기사였다. 일본으로 식량을 공출하면서 식민지 한국 백성들이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자 만주 등지에서 들여온 콩깻묵(豆粕) 같은 동물용 사료를 공급했다.

식민지 백성들을 압박하는 것은 공출뿐이 아니었다. 일본 본토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하는 판국이니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제는 1941년 2월 제령 제8호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반포했는데, 이는 ‘악법 위의 악법’이었다. ‘악법도 법이다’란 말 속에는 악법이라도 지키기만 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예방 구금은 아무런 법 위반을 하지 않았어도 마음대로 잡아가둘 수 있다는 희한한 법이었다. 예방구금은 검사의 청구에 따라 재판소 합의부가 결정한다지만 재판소는 허울 뿐이고 검사가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이 법의 제10조는 “출두명령에 불응하거나 주거부정·도주·도주의 우려가 있을 때 재판소는 대상자를 강제로 구인할 수 있다”는 것이며, 제11조는 ‘주거부정·도주·도주의 우려가 있는 자는 예방구금소나 감옥에 가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7조는 ‘구금기간은 2년이며, 재판소의 결정으로 갱신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2년씩 반복해서 죽을 때까지 투옥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해 3월 8일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악(改惡)했는데 과거 “국체를 변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함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정(情)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조항에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를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상향시켰다.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만큼 종말이 가까워 왔다는 뜻이다. 식민지의 상류층들은 연일 계속되는 일제의 승전보에 취해서 일본이 미국과 싸워도 이길 것으로 착각했다.

폭력배 출신으로 일본의 중의원까지 되었던 박춘금(朴春琴)이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8월 6일 제71제국의회에서 “조선 출생의 일본인은 제국 군인으로 제1선에 서서 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라며 조선에 지원병 제도를 시행해 달라고 청원한 것은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최린(崔麟)은 대미 개전 직전인 1941년 11월 『삼천리』에 실은 ‘임전애국자(臨戰愛國者)의 대사자후(大獅子吼)!’란 글에서 “문제의 인물은 사실상 장개석(蔣介石)이도 아니요, 영국 수상 처칠도 아닙니다. 오직 미국(米國) 대통령 루스벨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루스벨트를 재교육시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사자후를 토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최린은 루스벨트를 겨냥해 “‘당신이 일본의 국체와 실력을 인식하오’라고 말하고 싶다. ‘대화(大和:야마토)의 정신을 아느냐’고 말하고 싶다”며 자신이 태생부터 일본인인 것처럼 말했다.

역시 33인의 한 명이었던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朴熙道)는 1942년 초 ‘미·영 타도 좌담회’의 사회를 보면서 “좌담회를 시작하기 전에 일동 기립하여, 무운장구(武運長久)와 영령에 대해 감사의 묵도를 올렸으면 하는 바입니다(『동양지광』 1942년 2월호)”라고 말했다.

이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섰던 것은 모두 일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주만 습격에 성공한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눈부시게 빨랐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도 서전은 항상 승리로 장식했다. 1941년 12월 10일 루손 섬에 상륙했고, 11일에는 괌, 23일에는 웨이크, 25일에는 홍콩을, 1월 2일에는 마닐라를 점령했다.

난관은 영국의 퍼시빌 중장이 8만5000명의 혼성부대를 이끌고 있는 싱가포르였다. 그러나 일본의 야마시타(山下奉文) 중장은 3만5000명을 이끌고 1942년 2월 7일 공격을 시작해 8일 만인 15일에 싱가포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 전선에 전력을 기울이던 영국은 싱가포르에 약체의 혼성부대를 배치하고 있었지만 싱가포르 함락 소식은 일본이 이길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 화교 대량학살
일본인들은 전후에 1931년의 만주사변부터 패전 때까지 두 번의 큰 기쁨을 맛보았다고 회고하곤 했는데, 1938년 10월의 한구(漢口) 점령, 1942년 2월의 영국령 싱가포르 함락이 그것이었다. 그때마다 제국(帝國)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해서 제등행렬이 이어졌고, 곧 중국과 전 세계를 점령할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한구 점령이 중일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던 것처럼 싱가포르 점령도 세계 정복의 끝이 아니라 몰락의 시작에 불과했다. 게다가 야마시타의 일본군은 중국의 국민정부를 지원한다는 혐의를 씌워 화교(華僑)들을 집단 학살했다. 남경학살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싱가포르에서 약 2만5000명, 말레이시아에서 10만여 명의 화교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시민들이 물건을 훔치다 잡히면 머리를 잘라 접시에 담아 캄파야 시장에 전시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야마시타는 패전 후 화교 학살 혐의로 전범재판에서 사형당했다.

싱가포르 점령 후 곧 세계를 점령할 듯한 환호성에 빠졌던 일본인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는 데는 넉 달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1942년 6월 5일 발생한 미드웨이 해전이 그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역시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태평양까지 전선을 확대한 일본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드웨이를 점령해서 중간 기지로 삼으려 했다. 미국 항공모함 3척, 일본 항공모함 6척이 각각 순양함 등을 이끌고 맞붙은 미드웨이 해전은 미·일 양군이 서로의 작전을 인지하고 맞붙은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결과는 일본 해군의 궤멸이었다.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이 격침당했다. 미군은 항공모함 1척만을 잃었는데 전사자도 미군이 307명인 데 비해 일본군은 그 열 배인 3057명이었다. 이 패전으로 일본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 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일본 신문들은 사실과 거꾸로 보도했다. 대본영에서는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격침, 전투기 120대 격추, 아군 피해 항공모함 1척 상실, 1척 대파, 순양함 1척 대파, 미귀환 전투기 35기’라고 발표했고, 일본 국민들은 ‘미드웨이에서도 이겼다는군’이라고 환호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6개월 만에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음을 말해준 것이었다. 이후는 유년군사학교 출신의 전쟁 기계들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발악한 기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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