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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기리기 위해 1706년 숙종 때 지은 현충사 … 옛집은 충무공 살던 그대로

현충사 본전.


우리 지역의 역사와 유래를 알아보는 우리동네 그때 그 시절 아산. 이번에 소개될 곳은 아산의 역사와 함께해 온 현충사다. 이곳은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1706년(숙종 32)에 세운 사우다. 한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일본의 국권 침탈로 돌볼 수 없게 돼 퇴락한 적도 있었지만 1932년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성금을 모아 중건했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마쳤다. 그 뒤 아산에서 맹씨행단, 공세리성당과 함께 가장 유명한 역사문화관광지로 발돋움 하며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 동네 그때 그 시절 아산 ②



아산의 역사문화관광지 현충사



현충사는 크게 11곳으로 나뉜다. 본전·옛집·충무정·이면공·활터·홍실문·구본전·정려·충무문·충무공이순신기념관 등이다. 본전은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1967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준공된 콘크리트 한옥 건물이다. 이곳에서 매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 기념다례행제가 열린다. 또한 옛집은 충무공이 살던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본래 충무공이 태어난 곳은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이다. 이곳은 충무공이 21세에 전 보성군수 방진의 무남독녀와 혼인하면서 처갓집인 물려받아 살게 됐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그 밖에 궁전, 관아, 능, 사당 등에 들어오는 길머리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인 홍무문과 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 등도 충무공 가문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2011년 4월 개관한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는 충무공 관련 유물과 여러 역사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한 자료를 토대로 역사테마전시관 조성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 임진왜란사 등을 소개하고 역사 교육 및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요유물은 국보 3종 9점, 보물 17종20점, 지정대상 2점, 기타 6점 등 40여 점으로, 기존 현충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이순신장군의 유물 16점 외에 13점의 보물급 국가지정문화제가 추가됐다. 이중 9점은 이순진장군 종가에서 지난 2009년에 기탁했다고 한다.



 현충사관리소 관계자는 “이곳 현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그 분의 애국충정 기리는 곳”이라며 “봄 꽃과 가을단풍이 아름다워 연간 100만여 명이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9년 4월 28일 현충사 정문 충무문 앞에서 거행된 식전에 귀빈, 학생들이 모여 있다. [사진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삶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문헌에 따르면 “이순신은 어려서 놀 때도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로 보아 이순신은 어렸을 적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혼인 후, 장인 방진의 영향으로 무관이 돼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28세가 되던 해(1572년) 무과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마해 왼쪽 다리가 골절된다. 이때 이순신은 옆에 있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끝까지 시험에 응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공은 장차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군사 훈련과 시설보수 등을 강화해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해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거북선을 완성한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덕에 이순신은 여러 해전에서 연승을 거둔다. 이후 1592년 9월 1일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이를 ‘부산해전’이라 한다. 부산해전은 다른 해전과는 달리 적의 본진으로 직접 들어가 대규모 함대를 포격하는 공세적인 작전이었다.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그 죄는 조정을 기망하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조의 노여움이 심해 도체찰사 이원익과 서애 유성룡조차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우의정 정탁이 이순신을 구명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선조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이순신이 이룬 그간의 공적과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된 조정의 출격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하면서 구명을 호소했다. 이는 다행히도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을 하도록 명을 받게 된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 나와 언제나 백의종군 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곧 철수 할 것이라는 정보가 전해지면서 전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일본군측은 철군준비에 들어갔으며, 명나라는 자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이를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결국 이순신의 끊임없는 설득에 명나라 해군제독 진린은 마음을 돌리게 됐고 일본군의 해로를 봉쇄하기로 한다. 이에 1598년 11월 18일 조명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오는 일본군 함대를 맞아 전투를 벌였으니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치열한 접전 끝에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순신은 적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고 만다. 하늘의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으니 이때는 이순신이 54세 되던 해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여 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또 있다. 이순신의 후예들이 아산에 남아 계속 나라를 위해 힘썼으며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독립운동을 펼치며 이순신의 정신을 이어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걷고 싶은 도로 은행나무 길도 관광 명소



현충사 인근에 ‘은행나무 길’은 또 하나의 관광 명소다. 이 도로는 지난 2000년 국토해양부 주관 ‘아름답고 걷고 싶은 도로’로 선정됐으며 산림청 주관 ‘아름다운 숲’으로 2년 연속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곡교천을 끼고 국도를 따라 1.6㎞ 가량 조성돼 있는 길로 1973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350여 그루가 왕복 2차로에 심어지게 됐다. 그 후로 40여 년의 세월 동안 은행나무는 더욱 우람하고 빼곡해졌다. 은행나무 가지는 지붕을 이루어 하늘을 덮었고 긴 터널이 되어 사계절 내내 각각의 색채와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곡교천과 어우러져 지나는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안겨준다. 왕복 2차로 사이로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 숲길 수변데크는 2010년에 완공됐다. 충무교에서 현충사 입구를 향하는 1.6㎞ 구간에 2m 폭으로 조성됐으며 곡교천과 은행나무 숲길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도 만들어져 보행자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정리=조영민 기자 , 도움말=문화재청, 박노을 온양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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