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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니면 누가 이걸 만들겠어 내심 뿌듯하다가도 이름값 없던 초짜로 돌아가고 싶어져요

남자는 액션영화광이었다. 꼬마일 때부터 오줌 냄새와 오징어 냄새가 뒤섞인 동네 극장에 드나들며 이소룡과 성룡 영화에 빠졌다. 8㎜ 필름 카메라로 첫 영화를 찍은 게 고2 때.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대학을 가지 않고 독학으로 영화를 배웠다.
여자도 영화가 좋았다. 영화광은 아니었지만 영화가 갖는 사회적 역할과 힘을 믿었다. 대학 생활 내내 학생운동에 몰두했던 여자는 같은 과 친구들처럼 가정 과목 교사가 되는 대신 영화사에 들어가 홍보·마케팅과 제작을 배웠다.

관객 600만 돌파한 영화 ‘베를린’ 감독 류승완, 제작자 강혜정 부부

영화 공부를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고 세 아이를 낳았다. 스물 일곱 살에 ‘천재’ 소리를 들으며 데뷔해 촉망받는 감독이 된 남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잘한 일로 ‘결혼을 한 것’과 ‘동생 배우 시킨 것’을 꼽는다.
이제는 충무로의 대표적인 부부 영화인이 된 남자와 여자. 류승완(40) 감독과 영화사 외유내강의 강혜정(43) 대표다. ‘배우 시킨 걸 잘했다 싶은 동생’은 알려져 있다시피 배우 류승범(33)이다. 최근 관객 600만 명을 넘기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액션 대작 ‘베를린’은 강 대표가 제작하고 류 감독이 연출했으며 류승범이 출연한다. ‘패밀리 비즈니스’란 표현이 딱 어울린다.
두 사람에겐 그동안 부부 인터뷰나 류 감독의 동생이자 배우 류승범과 함께하는 가족 인터뷰 요청이 적잖게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 응한 적은 거의 없다. “남들 입에 필요 이상 오르내리고 주목받는 걸 원치 않아서”다. 결혼 17년째에 접어든 지금 ‘고졸 출신 성공한 감독 남편과 연상의 제작자 아내’라는 세상이 붙인 꼬리표가 새삼스러운 것도 이유일 것이다. 연애 시절을 포함해 20년 넘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 부부를 18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이들은 대안학교인 ‘꽃피는 학교’에 다니는 중3, 초4, 초2 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

1 영화 ‘베를린’의 한 장면. 베를린에서 불법 무기거래를 수사하던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왼쪽)는 ‘인민영웅’으로 추앙받는 북한 공작원 표종성(하정우)과 맞부딪치게 된다. 2 남편 표종성에게서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는 아내 련정희 역의 전지현. 3 류승완 감독의 동생이자 강 대표의 시동생인 배우 류승범. 표종성을 제거하기 위해 북에서 내려온 동명수 역을 맡아 능숙한 영어 연기를 선보였다.
남편 “감독으로서 내 바닥을 봤다” 아내 “해 줄 게 없어 속상했다”
‘류승완 연출, 강혜정 제작’은 ‘짝패’(2006), ‘다찌마와 리’(2008), ‘부당거래’(2010)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앞의 두 작품은 흥행하지 못했고 ‘부당거래’는 관객 300만 명이 좀 안 되는 ‘중박’을 기록했다. 하정우·전지현·류승범·한석규 등 스타 캐스팅을 앞세운 ‘베를린’은 규모나 흥행 성적으로 보나 둘의 협업 시스템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할 만한 작품이다. ‘쉬리’(1998) 이후 시도된 첫 분단 소재 블록버스터 에 대한 평은 대체로 후한 편이다. 손익분기점도 이미 넘어 그동안의 흥행 부진으로 진 빚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흥행의 달콤함을 음미하는 기색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그보다는 영화라는 업(業)을 ‘한때의 꿈’이 아닌 ‘지속 가능한 현실’로 이어가야 하는 중견 영화인의 부담감이 역력했다. 남편은 “감독으로서 내 바닥을 봤다”고 토로했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류 감독은 ‘베를린’ 라트비아 현지 촬영에서 난생처음 우울증을 겪었다. 입맛이 없어 초코바 한 개로 하루 끼니를 대신하기 일쑤였고 벼랑 끝에 몰린다 싶었을 땐 삭발을 하기도 했다. 대작에 대한 압박감 탓이었다. ‘베를린’ 순제작비는 108억원. 직전 작품인 ‘부당거래’는 32억원이었다.
“제가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아서인지 돈 쓰는 법을 잘 몰라요. 보통 사람한테 108억원은 평생 만져보기 힘든 어마어마한 돈이잖아요. 만약 제 통장에 지금 100억원이 입금됐다고 하면 전 당장 일 그만둘지도 몰라요.(웃음) 영화는 의식주와 달리 생존에 꼭 필수불가결한 건 아니니까 이렇게 큰돈을 선뜻 쓰는 데는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죠. 해외 촬영에서 하루 허탕치면 예산 초과는 금방이거든요. 장비가 고장 나고 스태프가 도망가는 악몽을 매일같이 꿨어요.”(류승완)
“류 감독은 제작자 입장에선 참 훌륭한 감독이에요. 한국 감독 중 류 감독처럼 예산과 일정 지키면서 잘 찍는 감독이 그리 많지 않거든요. 똑똑하고 부지런하죠. 시나리오 개발부터 촬영 끝날 때까지 자학한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들들 볶아요. 아내 입장에선 그걸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라트비아 촬영 때 전 아이들과 있느라 같이 못 갔어요. 어느 날 아이들이 아빠랑 영상통화 하는 걸 보니까 남편이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거예요. 막내가 아빠, 하니까 갑자기 남편이 엉엉 울더군요. 다음날 바로 비행기 타고 날아갔죠. 여자 후배들이 저보고 ‘언니 부부가 제 롤모델이다’라고 하면 전 그래요, ‘웬만하면 헤어져라. 둘 다 영화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웃음)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결혼해, 일단 질러, 그랬을 텐데.”(강혜정)
“한 번도 예산 초과나 일정 초과를 해본 적이 없는데 전 사실 그런 제가 불만스러울 때가 많아요. 창작자는 어떤 선을 넘더라도 자기만의 것을 찾으려고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특별한 뭔가가 나오는 건데…. ‘베를린’ 해외 촬영 장면에 대해서도 몇몇 평론가들이 ‘한국에서 찍었다면 류승완 감독이 오케이 하지 않았을 컷이 일부 있다’고 지적했는데 수긍할 수밖에 없더군요.”(류)
업무와 사생활의 경계가 모호한 건 ‘패밀리 비즈니스’ 종사자의 숙명이다. 남편 겸 감독, 아내 겸 제작자의 조합은 장점과 단점 중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을까. “회사 오면 집 걱정, 집에 오면 회사 걱정이죠. 아침에 애들 얘기하다가 사무실에서 회의하면서는 의견 차이로 부딪혔다가 다시 집에 와선 애들 얘기하니까 스트레스가 늘 해소되지 못하는 느낌도 들어요.”(류)
게다가 강 대표는 일하는 엄마다. 아이가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나(!) 된다. 밤샘을 밥 먹듯 하고 고되기로 소문난 영화 일을 어떻게 해왔을까. “친정 엄마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일에선 류 감독이 아무래도 저보다는 짐을 많이 졌죠. 일단 기획안이 확정되면 나머지는 남편이 많은 부분을 알아서 해요. 남편이 ‘같이 일하는데 왜 나만 스트레스 받느냐’는 불만도 많았죠. 일도 중요하지만 한참 크는 아이들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겐 확고했어요. 그래도 ‘베를린’ 하면서는 아이들 불만이 아주 심했어요. 엄마·아빠 둘 다 너무 바쁜 데다 늘 걱정하는 모습만 보여줬으니까요.”(강)
3년 전 ‘부당거래’ 개봉 직전 류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아내가 ‘이 영화는 사람들의 공분 대신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했는데 참 정확한 조언이었다”고 말했다. ‘베를린’에서 강 대표의 조언이 다시 역할을 한 대목은 북한 공작원 표종성(하정우)과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의 통역 련정희(전지현)의 관계 설정이었다.
“강 대표가 이 영화엔 ‘쉬리’ 같은 멜로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했어요. 전 화를 버럭 냈죠. 냉혹한 스파이의 세계에 무슨 멜로냐고.(웃음) 촬영이 끝나갈 때쯤 깨달았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새 멜로를 찍고 있었고 강 대표 말이 맞았다는 걸요. 제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아내가 짚어줄 때가 꽤 많아요 .”(류)
“감독은 만드는 사람이고 제작자는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게 제 철학이에요. 투자받아 캐스팅하는 데까지가 제 일이고 콘티 짜는 것부터는 감독의 영역이죠. 그걸 존중했기 때문에 류 감독과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강)

“속 끓이고 지지고 볶는, 여느 맞벌이 부부들처럼 살아요”
20대 남녀의 꿈이었던 영화는 이제 세월이 흘러 40대로 접어든 부부의 ‘밥벌이이자 직업’이 됐다. “‘베를린’ 같은 영화, 우리 아니면 누가 만들어? 하는 자부심도 물론 있죠. 하지만 어렸을 때 막연히 꿈꾸던 것과 현실은 다르다는 생각이 요샌 많이 들어요.”
그래서 이들은 영화가 대박이 난 지금, 다시 초심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멋진 영화 보고 감탄하고 정화되고 자극받아 다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던, 처음의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이름값이나 기대치에 눌리지 않고 자유롭게요.”
두 사람이 차린 영화사의 이름은 외유내강. 남편은 부드럽고 아내는 강인하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했다. “실제론 둘 다 일희일비, 우왕좌왕, 안절부절이죠.(웃음) 속 끓이고 지지고 볶는, 여느 맞벌이 부부랑 다를 거 하나도 없어요.”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같은 여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기억에 계속 남는 건 강 대표의 한마디였다. “예술가의 아내라는 게 힘든 점이 참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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