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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세 장의 그림이 말하는 것은

대중의 역사

스테판 욘손 지음

평등 향한 대중의 도도한 열망

양진비 옮김, 그린비

303쪽, 1만7000원




“인민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저 성난 이들의 노래가. 그것은 다시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인민의 음악이다. 너의 심장의 고동이 북의 고동에 반향을 일으킬 때, 내일이 오면 시작될 삶이 있다.” 대선 결과에 낙담한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것은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었다. 거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대한 바리케이드의 장관이리라.



 바리케이드에는 거절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대중의 역사』를 쓴 스테판 욘손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우리는 (…) 그들을 대신하여 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거절하는 인민의 그늘을 감지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민이다.” 바리케이드는 인민주권에 대한 황홀함과 그것이 낳을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는 동시에 “두려움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숭고함”이 존재한다. 이 숭고한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저자는 100년의 간격을 두고 제작된 세 점의 예술작품을 예로 든다.



 다비드의 ‘테니스 코트의 서약’(1791·사진③)은 1789년 혁명을 일으킨 대중이 인민주권을 선언하는 현장의 기록이다. 거기서 국민회의 의장을 제외하면 누구도 사람들보다 위로 솟아있지 않다. 그는 화면에 되도록 많은 사람을 집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가 ‘다수’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렇게 수립한 체제도 결국은 부르주아지만의 것이었다. ‘비참한 자들’(les miserables), 즉 세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못 가진 자들, 이성의 힘으로 열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못 배운 자들은 혁명이 수립한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도 참정권이 없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사진②)에서는 여전히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공화국의 상징 마리안과 나란히 전진한다. 하지만 못 가지고 못 배운 자들은 혁명 후에도 배우고 가진 계급을 통해서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대의(代議)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대혁명의 시절 대중은 소수가 사회의 ‘일반의지’를 대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혁명조차 사회의 대다수를 소외시키자, 각 계급이 제 이해를 직접 대변해야 한다는 관념이 등장한다. 1848년 혁명과 1872년 파리코뮌을 통해 등장한 것은 이 새로운 관념으로 무장한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트였다.



 하나의 대중이 계급으로 분열되면서, 부르주아지는 이제 자신을 대중과 구별되는 사려 깊은 이성적 ‘개인들’의 집합으로 표상한다. 반면 대중은 도덕적으로 열등하고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우중이나 폭도로 간주되어, 이제 범죄자, 노숙자, 심지어 광인과 같은 부류로 분류되기 시작한다.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대중심리학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을 바라보는 부르주아지의 공포를 보여준다. 대중의 집단행동은 ‘감응성 정신병’의 일종으로, 그 병에 전염되면 “의식 있는 인격의 소멸, 무의식적 인격의 우세, 암시된 생각이 즉시 행동으로 변형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엔소르의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1889·사진①)는 이 부르주아적 시각을 통쾌하게 전복한다. 그의 그림에서 모든 계급과 계층의 인물들은 우스꽝스런 마스크를 통해 모두 못나고 어리석은 존재가 되어 함께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 카니발의 축제는 계급과 위계 이전의 원초적 평등으로 돌아가려는 무정부주의적 욕망을 보여준다.



 “혁명은 그것의 산물을 집어삼킨다.” 인민의 영웅 당통은 단두대에 끌려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혁명의 산물이 혁명을 집어삼키기” 마련이다. 혁명은 또 다른 국가기구를 만들어내고, 그로써 자신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왜 붕괴했겠는가? 혁명이 진정으로 혁명적이려면 차라리 실패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유형의 혁명에 가장 근접한 것이 68혁명이었으리라. 알프레도 자르의 『그들은 너무 사랑했다. 혁명을』(1989)은 정치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외려 문화적, 예술적으로 성공한 그 혁명의 기억을 담았다.



 바리케이드를 쌓는 대중의 집단행동에는 직접 민주주의, 즉 “중앙집권화한 권력 없이 수평적 네트워크로 존속하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를 향한 욕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일체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원초적 수평으로 돌아가려는 우주론적 차원의 욕망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은 대중이 자기들 뜻대로 주물러 형상을 만들 수 있는 수동적 재료, 원료, 물질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 말대로 조야한 물질이되, 살아서 움직이며 스스로 형태를 취하려는 욕망을 가진 능동적 물질이다.



 19세기 파리의 바리케이드가 했던 역할을 오늘날에는 디지털테크놀로지가 하는 듯하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기성의 대의정치에 저항하는 인터넷과 SNS는 디지털의 바리케이드다. 대중이 대의를 거부하고 스스로 집단행동에 나설 때, 권력은 그것을 위험한 ‘광기’로 규정하려 한다. 거기에는 이렇게 대꾸해 주자. “그렇다. 우리는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미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에게도 입을 맞춘다. 당신들도 우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서울대 미학과(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1~3』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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