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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하려면 유학 왜 가나…안 시키려 영국 보냈다”

“이건 뭐 너무 잘났잖아.”신문 편집자에게 법무법인 태평양 김갑유(51) 책임 변호사의 이력을 보여줬더니 조건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 첫마디다. 세상 뭐 이렇게 불공평하냐는 듯, 약간 약 오른 듯 말하길래 무심하게 하나를 더 얹었다. “성격도 좋아. (물론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고서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부인은 디자이너고, 애들 둘은 다 영국 명문대 보냈어. 참, 타워팰리스 살아.”

글=안혜리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김 변호사는 법조계를 잘 모르는 일반인에겐 낯설지 모르지만 스타 변호사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여성 시청자가 많은 TV 아침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해 알아보는 주부가 많다거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민형사 사건을 맡아 유명해졌다는 게 아니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 독무대인 국제중재 분야에서 지난 10년간 탁월한 성과를 올리며 한국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 국내외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김 변호사는 2009년 11월 현대중공업과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가 현대오일뱅크를 두고 벌인 경영권 분쟁 사건에서 현대중공업을 대리해 승소를 이끌어내는 등 숱한 국제중재 사건에서 잇따라 승소해 이름을 알렸다. 현대오일뱅크 분쟁금액이 2조50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초대형 국제중재 사건이라 그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앞서 그해 5월엔 미국중재협회(AAA) 상임위원에 선임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이미 이때 세계 3대 국제중재기구로 꼽히는 런던국제중재법원(LCIA)과 국제상업회의소 국제중재법원(ICC Court)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AAA 상임위원에 선임됨으로써 국제중재 분야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셈이다. 국제중재 분야는 미국·유럽 등이 주도하고 있어 상임위원 중 아시아 출신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각 기구는 서로를 견제하는 심리가 있어 다른 기구 상임위원을 자기네 기구 상임위원으로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비주류인 아시아인이 세계 최초로 그랜드 슬램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니 ‘스타’라 부를 수밖에.

 게다가 지난해 5월 국제중재의 최고 권위 기관인 유엔 산하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A) 사무총장에 선출되기까지 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사법시험 패스하고 하버드대 법대 석사과정을 마친 미국 변호사라는 이력이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 화려한 이력에 잠시 찬물을 끼얹어 볼까. 이 정도 경력이면 치즈 섞인 영어발음을 구사할 것 같지만 그는 대구 출신임을 과감히 드러내는 ‘대구 영어’를 구사한다. 본인은 부인할 수 있겠지만 서울 사람 귀에는 분명 그렇게 들린다. 그리고 몇 년 전 전국 남성의 공분을 자아냈던 한 여대생의 “키 얼마 얼마 아래면 ‘루저’”라는 발언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루저’이긴 하다.

 하여간 김 변호사를 좀 더 대중적으로 알린,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만들 국제중재 사건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다. ISD란 투자자가 투자했던 상대방 국가의 차별적인 정책 등으로 손해를 봤을 때 해당 국가 법원이 아닌 제3의 중재기관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제도다.

론스타 사건을 기억하는지.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외환은행을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팔고, 론스타는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 후인 2010년 비싼 값에 국내 금융회사(하나금융지주)에 되파는 과정에서 정부의 헐값 매각 논란과 론스타의 4조원대 ‘먹튀’ 논란 등을 불러일으킨 바로 그 사건 말이다. 숱한 관련 소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국내선 “알짜 은행을 헐값에 팔아 미국 사모펀드 배만 불려줬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나 론스타는 오히려 “외환은행을 되파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매각 승인을 지연시키고 세금을 과하게 물려 2조원대의 손실을 봤다”며 지난해 11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공식적인 ISD 절차에 착수했다. 한국이 해외투자자로부터 ISD를 제기당한 건 처음이다.

 대상 금액은 2조4000억원. 액수는 현대오일뱅크 때와 비슷하지만 이건 단순히 소송 금액의 문제를 넘어선다. 한국 정부가 ‘국민 감정’을 건드렸던 이 미국계 사모펀드와 국가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초대형 국제중재 대전(大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지난해 8월 소송을 대리할 국내 측 법률회사(로펌)로 고른 파트너가 태평양이다. 그 중심에는 김 변호사가 있다. 태평양의 국제중재팀장으로 16명의 팀을 이끌고 소송 전반의 전략을 세울 뿐만 아니라, 2002년 국제중재팀을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도쿄, 오늘은 서울, 내일은 홍콩….
 
타워팰리스
웬만한 글로벌 비즈니스맨 저리 가라 할 만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김 변호사를 그의 바쁜 일정 틈틈이 만났다. 변호사 김갑유가 ISD 관련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다. 순전히 강남 주민으로서의 그의 삶을 듣기 위해서다. 김 변호사는 2002년 도곡동에 타워팰리스가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줄곧 거기서 살고 있다. 강남에는 1988년부터 살았다.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었다면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하는 점이다. 우선 강남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자녀 교육 얘기부터 물었다.

-자녀 둘 모두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조기유학을 보낸 건가.

 “애들이 각각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이던 1999년 영국 런던으로 보냈다. 애들 엄마가 공부하고 싶다길래 같이 보냈다.”

- ‘기러기 아빠’였던 셈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조기유학이나 ‘기러기 아빠’가 흔하던 시절이 아닌 걸로 기억한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나보다 주변에서 오히려 난리였다. 와이프 혼자 공부하러 보내는 걸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바람난다는 걱정이 제일 많았다. 애들 관련해서도 부정적 시각이 대다수였다. ‘한국말 배워야 하는 시기에 무슨 유학이냐’는 거다. ‘영국 사람 만들 거냐’고 대신 걱정해주기도 했다. 난 솔직히 깊게 생각 안 했다. 아내가 공부하고 싶다 하고, 애들도 좋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스스로의 판단이 중요하다.”

-영국에 갈 때 애들은 영어를 이미 잘했나.

 “전혀 아니다. 아주 어릴 때 잠시 미국서 살았지만 그건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영어유치원 그런 데도 안 보냈다. 공립학교(반포초등학교) 다니다 갔다. 가자마자 애들이 ‘한국서 공부하겠다’며 울었다. 그래서 엄마 공부 마칠 때 다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사람 공부가 끝난 2년 반 뒤 애들이 ‘남겠다’고 하더라. 한국서는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나중에서야 ‘여기에 있어 보니 당시 한국 선생님이 학생을 함부로 대했다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 때리는 게 싫었다고 털어놓더라.”

-애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나.

 “지금은 까다로워진 걸로 알지만 1999년만 해도 엄마 유학비자가 있으면 애들이 공립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둘 다 런던 첼시 지역 공립학교에 보냈다. 그러다 사립학교(데이 스쿨, 등·하교하는 사립학교)로 옮겼다. 그 후 보딩스쿨(사립 기숙학교) 보냈다. 엄마랑 같이 학교 투어 다니면서 애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를 직접 골랐다.”

-미국이나 영국서 학교 다니는 애들도 방학이면 한국에 와서 학원 다니고 과외 받는다. 김 변호사 애들도 비슷한가.

 “영국 학교는 1년 동안 긴 방학이 3번, 짧은 방학이 6번이다. 긴 방학 때는 주로 한국에서 부모랑 시간을 많이 보냈다. 영국엔 미국처럼 한글학교가 많지 않아 어릴 때는 한글 과외 선생님을 붙였다. 그러나 다른 과외는 안 시켰다. 나 혼자 내심 영국서 공부시키는 이유가 사교육 안 시키려는 의도도 있는데 한국 와서 여기 애들처럼 과외 다 할 거면 뭐하러 영국서 공부하나, 했다. 물론 다른 영국 유학생들 대부분은 다 과외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 그냥 저절로 가는 건 아니더라. 주변에서 보니 대부분 과외시켜 보내더라. 그런데 나는 그건 정말 싫었다. 그러려면 서울서 시키지 싶었다.”

-자녀는 어느 대학 나왔나.

 “큰딸은 워릭 유니버시티를 나와 런던정경대(LSE)에서 경제학으로 석사를 마쳤다. 아들은 런던의 임피리얼 칼리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다. 모두 좋은 대학이지만 다른 한국 부모의 눈엔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나 아내나 둘 다 아이들이 부모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갔다는 데 대해 정말 자랑스럽게 여긴다. 딸이 (한국적 잣대로) 더 좋은 대학에서 오퍼를 받았음에도 결정적 실수로 워릭에 가게 됐는데, 주변에서 재수시키라고 하더라. 딸은 ‘이 학교 좋다, 다니겠다’고 했다. 애의 주인은 애다. 이 문제에 있어서 부모는 애 결정을 따르는 종(servant)일 뿐이다. 영국은 대학 3년, 대학원 1년이다. 한국이라면 대학 다닐 나이에 우리 딸은 벌써 석사 받고 사회에 나갔다. 경쟁력 있다고 본다.”

-한때 유학 붐이 일다가 최근엔 다시 주춤한다고 한다. 현지에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아무래도 학맥 등의 면에서 손해를 본다는 인식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걱정은 안 하나.

 “전혀. 내 또래 친구들 애들은 대부분 다 유학 갔다. 한국서 공부시킨 게 10%나 될라나.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시대다. 서울대 법대냐가 아니라 앞으로는 LSE 출신이냐, 뭐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은 정말 빨리 변한다. 내가 애들을 처음 영국에 보낼 때만 해도 다들 뜯어말렸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다 보내더라. 몇 년만 지나도 당연한 일이 처음엔 그렇게 저항이 컸다. 또 아내가 굉장히 사교적이다. 유학 간 애들 가족모임을 만들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10~20가족씩 함께 만난다. 아이들끼리 선후배 관계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외국서 좋은 학교를 나오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 결국 한국이든 영국이든 좋은 학벌만 대접받는 거 아닌가.

 “우리 애들이 사회를 주도할 때는 달라질 거라 믿는다. 그 세대에 지금 같은 학벌 개념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 유명한 고려대도 옛날 같지는 않지 않은가. (웃음) 우리 태평양만 해도 어느 학교 나왔나, 하는 그런 출신 의식 전혀 없다. 물론 내가 만약 마케팅 분야에서 일한다면 이런 과거식 인맥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 옛날 패러다임은 바뀌었을 거다. 대원외고 출신이 경기고 출신만큼 많아졌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 경기고 선배가 후배 챙기듯 대원외고 출신이 서로 챙기나. 전혀 아니다.”

-꼭 유학 보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건 아니다. 다만 나는 애들한테 다른 한국 부모들이 하듯이 시간을 쓸 수 없다. 영국 교육시스템은 공부뿐 아니라 운동은 물론 전인교육을 시켜준다. 내가 시키고 싶은 교육을 영국 교육이 다 받쳐준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거 아닌가. 그래서 국내에 있는 외국인학교에 관심이 많은 거다. 수요가 있으면 부작용을 줄일 방법을 강구한 후 문호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막을 게 아니라.”

-이번엔 사는 얘기를 좀 해보자. 왜 타워팰리스에 사나.

 “정말 편리하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이렇게 집 바로 앞에 모든 서비스가 다 갖춰져 있는 데가 없다.”

-직장도 강남이다. 강북 갈 일이 별로 없겠다.

 “맞다. 매주 일요일 교회(새사람교회)는 강북으로 간다. 여러 교회를 가봤으나 분위기가 맘에 안 들었다. 여기가 좋더라. 부모님은 날 늘 칭찬하고 내가 어려울 때 위로해 주셨다. 내가 못한다고 쪼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교회도 우리 부모님처럼 편안한 곳이 좋다.”

-타워팰리스 사는 게 자랑스러운가.

 “그렇지는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도곡동 산다’고 말하면서 좀 부끄러워할걸. 편리함에 묻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다들 주눅 들어 있다. 하지만 물어봐라, 다들 강남을 떠나기는 싫다고 할 거다. 강남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지역이다. 최고의 인프라에 맞게 자부심도 최고 수준인 곳으로 바꾸고 싶다.”


내가 선택한 국제중재변호사는

25년 전 다들 말렸던 분야 … 지금은 아시아 최고 자부

 
김갑유 변호사는 1988년 사법연수원(17기)을 마치자마자 한미합동법률사무소에 들어갔다.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법률회사(로펌)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도 일반적인 게 아닌데, 그는 또 흔하지 않은 선택을 한다. 바로 전문 분야로 국제 중재를 택한 거다. 그에게 왜 이 길을 택했는지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로펌이 지금만큼 힘이 셀 때가 아니었다. 왜 로펌행(行)을 택했나.

 "원래 판사를 꿈꿨다. 81년 법대에 진학하고 4학년 때인 84년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변호사가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게다가 국제 중재 변호사라니. 국제 중재를 하려면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유로운 영어 구사가 필수 아닌가. 인생이 바뀐 계기는 뜻밖의 경험에서 나왔다. 연수원 생활을 할 때 로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유로우면서도 글로벌한 시각을 키울 수 있는 변호사가 되기로 방향을 바꿨다.”

-로펌을 택할 때 주위에서 말리지 않았나.

 "다들 말렸다. 불과 25년 전이다. 세상이 정말 빠른 속도로 달라진다는 걸 느낀다. 지금 돌이켜보면 국내 법률시장은 로펌과 변호사 시장으로 재편되고, 결국 판검사도 그중에서 뽑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게 뻔히 보인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다. 처음 변호사를 시작할 때 국내 로펌은 대개 변호사 10~20명이 전부였다. 지금은 웬만한 로펌은 350~400명에 달한다.”

-국제 중재란 분야는 여전히 생소하다. 어떻게 국제 중재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됐나.

 "맞다.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다. 가능성이 없다며 모두 말렸다. 하지만 난 도전해보고 싶었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금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안 될 거란 걱정부터 하는 건 무의미하다. 하기로 맘먹었으면 온 힘을 다해 해내는 게 맞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나.

 "두 명으로 시작했다. 1997년 모 제약회사 관련 사건이 첫 중재 건이었다. 16년 만인 2013년 현재 전담 팀원이 16명에 달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규모뿐 아니라 중재 분야에서 아시아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영어를 원래 잘했나. 어디서 배웠나.

 “국내 로펌에서 5년간 변호사 생활을 한 뒤 94년 미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석사 (LLM) 과정을 마쳤다. 미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95년)한 후 뉴욕과 런던 로펌에서 2년간 일을 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로펌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웠다. 이 분야 영어를 누구한테 배우겠나. 결국 다른 변호사들로부터 배우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일하면서 배워라.”


김갑유

1962년 51세
법무법인 태평양 파트너·국제 중재팀 책임변호사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A) 사무총장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법원 상임위원
미국 중재협회(AAA) 이사
세계은행국제투자분쟁센터(ICSID) 중재인

1981년 대구능인고 졸
1984년 26회 사법시험 합격
1985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93년 미 하버드 로스쿨 법학석사 과정
1995년 미 뉴욕주 변호사 자격 취득
2008~2010년 국제변호사협회 중재위원회 부위원장


 
사는 곳: 도곡동 타워팰리스(2002년~ )
근무하는 곳: 역삼동 법무법인 태평양
운동하는 곳: 타워팰리스 내 운동시설
장 보는 곳: 타워팰리스 스타수퍼와 아카데미스위트 지하 수퍼
가족(사진): 아내 디자이너 정선경과 1남(21) 1녀(23)
자주가는 식당: 타워팰리스 앞 ‘친친’ ‘그안’ ‘야마모토’ ‘김영모 제과점’


자녀

남매, 7·9세 때인 1999년 말 영국 조기 유학

딸: 런던 첼시 지역 공립학교→런던 퀸스게이트사립학교(데이스쿨)→다운하우스(세컨더리·여자 보딩스쿨)→워릭 유니버시티(경제학)→런던정경대(LSE) 대학원(경제학) 졸

아들: 런던 첼시 지역 공립학교→애시다운하우스(프렙·보딩스쿨)→윈체스터(세컨더리·보딩스쿨)→임피리얼 칼리지(기계공학)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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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