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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시행착오다

‘S자’로 마주보게 고안된 영국항공 비즈니스석(2000).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넓어졌고, 항공사 입장에서는 더 많은 좌석을 만들 수 있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항공사를 혁신한 디자인 경영의 사례로 꼽힌다. 영국항공은 이어 비즈니스석을 ‘Z자’(2008)로 또 한 번 혁신했고, 1등석 디자인도 바꿨다. [사진 탠저린]

이돈태 대표
그의 대표작은 2000년 영국항공(브리티시에어웨이) 비즈니스석이다. 만성 적자에 허덕였던 이 항공사는 비행기 꼬리 디자인을 개선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났다. 고객에게 와 닿는 서비스 개선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가장 매출이 큰 비즈니스석을 혁신하기로 했다.

 영국의 디자인 회사 탠저린에서는 ‘S자’로 마주보는 좌석을 고안했다. 승객을 20% 더 태울 수 있으면서도 불편함을 주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덕분에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누울 수 있었다. 영국 최고 권위의 디자인상인 IDEA 그랑프리(2001)를 수상했다. 새 디자인이 인기를 얻자 영국항공은 1등석 좌석도 바꿨다. 이돈태(46) 탠저린 공동대표는 “이 의자로 영국항공의 영업이익이 연간 8000억원 가량씩 올랐다”고 했다.

 탠저린은 영국항공뿐 아니라 런던 교통국, 삼성전자, LG전자, 히다치, 도요타, 니콘 등과 함께 일하는 회사다. 이 대표는 아시아 지사인 탠저린 앤 파트너 사장도 맡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초빙교수. 지난해 말까지 6년간 삼성물산 건설부문 주택사업부 디자인 고문으로도 일했다.

 14일 이 대표를 만났다. 그는 2005년 서울 삼성동 골목 안 2층짜리 고깃집 건물을 매입해 아시아 사무소를 열었다. 사장실도, 정해진 책상도 없었다. 인터뷰는 회의실 격인 1층 주방 옆 탁자에서 이뤄졌다.

삼성물산의 한국형 욕조(2008?사진 위), 도요타의 컨셉트카(2006) 디자인. [사진 탠저린]
 -시작이 궁금하다.

 “디자인을 접하며 사는 문화적 배경은 아니었다. 고향은 강원도 강릉시,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사생대회에 나가고, 집에 갖춰둔 화구로 그림 그리기를 즐기셨다. 강릉고에서 그리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던 덕분에 진로를 고민하다 미술을 생각했다.”

 시골 화실에 다니던 미대 준비생은 정해진 시간 내에 ‘답안지’를 그려내는 데 서툴렀다. 삼수 끝에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에 들어갔다. 이후 동대학원을 마치고 런던 왕립예술학교(RCA)로 유학을 떠났다. 외환위기 때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탠저린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1998년 입사 당시 6명이던 이곳의 디자이너는 현재 영국·한국·브라질 통틀어 50여 명이다.

 한국인으로 외국 회사에서 성공한 비결을 묻자 그는 “그땐 그만큼 절실했다”고 대답했다. 돈 들이지 않은 사무실만큼이나 소박한 말투는 그가 가진 여러 개의 직함에서 풍기던 인상과는 딴판이었다. 허나 한국의 디자인 현실을 말할 때는 짧게 친 머리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단호했다.

 -영국항공 비즈니스석 외에 대표작은.

 “래미안의 한국식 욕실이다. 이걸로 2009년 if 어워드도 받았지만, 국내의 굿디자인 대상(대통령상)이 내가 받은 중 가장 큰 상이다. ‘세계 디자인 구루(guru·권위자)’‘세계 3대 디자인상’ 이런 말들 안 썼으면 좋겠다. 예컨대 if 어워드는 독일서 자국 산업 발전을 위해 만든 상인데 독일인 외에 한국인·중국인이 열심히 응모한다. 우리 스스로가 좀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린 굉장히 노력하고, 창의력 강한 민족이다.”

 이 욕실은 샤워기 아래 발을 얹고 씻거나 잠시 걸터앉을 수 있는 거치대를, 욕조 옆엔 손빨래를 하거나 애완동물을 씻길 수 있는 작은 욕조를 뒀다.

 -우리 아파트가 디자인적으로 내세울 만한가.

 “천편일률의 아파트 입면을 시각적 공해라고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허나 지적하긴 쉬워도 개선하긴 어렵다. ‘평등한’ 아파트 입면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산에 동일한 기회와 가치를 두고자 하는 입주민들의 요구가 녹아 있다. 때문에 한국의 아파트는 디테일·서비스에서 차별화를 두며 진화해왔다. 제품, 브랜드, 서비스, 공공 디자인, 건축까지 모든 요소를 다루는 디자인의 종합 무대다.”

 -기업 컨설팅을 하며 느낀 점은. 예전에 삼성 사장단 강연에선 “디자인이 마케팅의 시녀가 돼선 안 된다”고 꼬집은 바 있다.

 “디자이너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시간도, 시행착오할 기회도 필요하다. 애플이 왜 성공했나. 저 디자인을 갖고 1년, 2년씩 개발해서다. 우리는 저런 일을 두 달 만에 해내야 한다. 날 때부터 천재, 디자인의 구루, 이런 것 없다. 결국 누가 더 오래 고민했느냐의 문제다. 어느 순간 화장실에서 튀어 나오는 아이디어, 그런 것도 없다. 화장실까지 끌고 들어갈 만큼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는 “200개 가까운 프로젝트를 해 왔지만 정해진 과정대로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용이 비슷하다 싶으면 클라이언트의 이해도나 시장, 타깃 고객이 달랐다”고 말했다. 시행착오를 부르는 새로운 도전, 그게 그가 질리지 않고 디자인에 열의를 쏟는 이유다.

 -왜 지금 디자인인가.

 “한국 디자인엔 착시현상이 있다. 실은 우리 디자인 수준이 그리 높진 않다. 삼성전자·LG전자 등 대규모 디자인팀을 가진 회사들의 수준을 우리 수준인 것처럼 여긴다. 우리에겐 아주 강한 선두그룹과 약한 후발주자가 있을 뿐 중간 허리가 없다. 중소기업을 살릴 방법은 디자인이다. 그래서 기다려 주는 게 필요하다.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멕시코에 이어 2위다. 노동시간이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디자이너의 핵심 자질이라면.

 "글쓰기다. 글 쓰는 것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거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고객을 위한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서다. 프로그램 다루기나 그리기는 배우면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고하느냐다. 모든 게 여기서 시작한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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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