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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남편 따라 산에 갔고 다리도 잃었어, 우리 얘기야”

박정덕씨가 서울 보라매동 집에서 현대사이념 전선의 한복판에서 살아온 드라마같은 삶을 회고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한 많은 인생이라 그냥 죽기는 억울해 기록을 꼭 남기고 싶었지.”



자서전 낸 81세 박정덕씨 “질곡의 역사, 삶 남기려”

 박정덕(81)씨는 서울 관악구의 ‘어르신 자서전 제작지원사업’에 참여, 지난해 자서전을 출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자서전은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삶이 뒤틀려버린 보통 사람의 얘기다.



(중앙일보 2월 4일자 17면)



 박씨는 빨치산이었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 여맹위원장. 그가 빨치산이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결혼식 날 한 번 보고 헤어진 남편이 빨치산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는 곡성의 부잣집 막내딸이었다. “일본 식민지 때인데도 학교를 다녔어. 아버지가 나랑 오빠랑 공부시킨다고 서울 안국동에 집도 사놨었대. 친구네 식구들이 보리밥을 먹는 걸 보곤, 아 보리밥도 먹는거구나 생각했지.”



 곱디 곱게 자라던 그의 인생은 1946년 9월, 조선노동당 면당위원장이던 남편 이병관씨와의 결혼으로 완전히 뒤바뀐다. 남편은 결혼식 날에도 산에서 잠깐 내려와 식만 올리고 마을을 떠났다.



 그 다음날부터 박씨의 삶은 악몽이었다. “순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 온갖 고문에 성적 학대도 당했어.” 아버지가 고문 당하는 박씨를 경찰서에서 빼내기도 여러번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다시 잡혔다. 결국 박씨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즈음한 51년 남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고문 당하는 것보다 산 생활이 더 편했다”는 그는 이후 백운산·봉두산·통명산·백화산 등 화순과 곡성·구례 인근의 산속에서 살았다. 자고 일어나면 텐트 위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땅굴과 천막을 전전했다. 화순 백화산에 있던 노동당 전남도당학교에도 나갔다. 학교를 마친 뒤 곡성군 도달면 여맹위원장이 됐다. 호신용 수류탄 하나를 들고 다녔다. 가끔 남자들이 입을 덧버선과 속옷을 만들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52년 벌어진 빨치산 토벌작전. “언덕을 굴러 내려오다가 얼음 위에서 다리를 다쳐 낙오했어.” 박씨는 바위 굴 속에서 혼자 한 달 보름을 지냈다고 한다. 식량은 동료들이 떠날 때 준 밥으로 버텼다. 동상이 걸린 다리가 썩어들어가자 쥐들이 몰려들었다. “그땐 쥐 쫓아낸 기억밖에 없어.” 견디다 못한 그는 기어서 산 아래 마을로 들어갔고 곧 경찰에 체포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구례경찰서에서 들었다. 다리도 잘라냈다. “마취에서 깨니까 다리가 없었어. 많이 울었지. 22살 때였어.” 그는 이후 광주형무소에서 7년을 살고 59년 출소했다. 남편은 53년 사망했다. 골짜기에 비장해둔 식량을 찾으러 가는 도중에 대원 하나가 밀고해 총살 당했다고 했다.



 62년 재혼한 박씨는 83년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했다. 지금은 서울시에서 마련해 준 보라매동의 작은 집에서 다른 할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생활비는 기초생활보호수당과 장애수당 등을 모두 합쳐 약 50만원. 그는 “한때 한국 정부의 반대편에 섰던 내가 이제는 정부 지원을 받아 살아가고 살아온 이야기까지 남길 수 있게 돼 감격스럽다”고 했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세대를 젊은이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글=한영익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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