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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극복 위해 대연정 관철 ‘중재의 달인’

1969년 2월 27일 베를린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가운데)이 키징거(오른쪽)와 함께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1966년 에르하르트 총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라인 강의 기적의 주역인 에르하르트 총리 때 경제는 나빠지고 실업률이 높아졌다. 게다가 파트너인 자민당(FDP)이 재정적자와 관련한 충돌로 소(小)연정을 깨고 나갔다. 전후 처음으로 소수 내각이 된 기민당(CDU) 정권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행복한 경제강국’ 독일의 리더십 해부 ③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기민당은 재빨리 새로운 리더를 찾아 나섰다. ‘늙은 여우’ 아데나워의 지원 아래 젊은 주지사 헬무트 콜이 중심에 섰다. 그는 에르하르트 총리 후임으로 4명의 후보를 당원들에게 추천했다. 연방의회 의장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원내총무 라이너 바르첼, 외무장관 게르하르트 슈뢰더, 그리고 주지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였다. 당 대회에서 세 번의 투표 끝에 키징거는 가까스로 승리했다. 이때부터 그의 장점인 타협의 정치가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캐스팅 보트를 쥔 기사당(CSU)의 실력자 프란츠 스트라우스와 손잡았다. 그에게 장관 자리를 약속했다. 키징거는 아데나워 같은 카리스마도, 에르하르트 같은 돌파력도 없었다. 잘 생긴 얼굴에 말솜씨가 좋고 친화력이 뛰어났다. 당원들의 추대를 받은 그는 기민당/기사당의 총리 후보가 됐다.

그는 사민당(SPD)의 원내총무이자 막후 실력자인 헤르베르트 베너를 몰래 만난다. 둘은 대연정을 꾸리기로 묵계를 했다. 오히려 베너가 대연정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건국 이후 한 번도 정권을 잡은 적이 없는 사민당은 수권 능력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베너는 생각했다. 키징거와 베너가 각각 자민당에 소연정을 제안했지만 형식적이었다. 자민당 당수였던 에리히 멘데는 훗날 “코끼리의 결혼식(대연정)에 합의해 놓고 우리를 속일 만큼 그들은 재주가 좋았다”고 평가했다. 사민당의 총리 후보였던 빌리 브란트와 당의 두뇌였던 헬무트 슈미트가 대연정을 지지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두 정당은 공동 정강을 마련하고 권력의 파이를 나누는 권력게임에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자유언론을 탄압한 ‘슈피겔 사건’으로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슈트라우스가 재무장관에, 이 사건의 희생자인 콘라트 알러스가 정부 부대변인에 각각 임명됐다. 부총리 자리는 총리 후보를 넘보던 빌리 브란트에게 돌아갔다. 키징거는 대연정 성사를 위해 권력 지분을 갖고 있는 정치세력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마라톤 협상 25일 만에 양당 대표들은 와인과 위스키로 대연정의 축배를 들었다. 66년 12월 1일 독일 의회는 의원 473명 가운데 340표로 키징거를 3대 총리로 뽑았다. 당시 대연정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저성장과 계층 갈등, 리더십 부재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했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반면에 좌파 언론은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리는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1966년 11월 대연정의 총리 후보로 지명된 키징거가 물러나는 에르하르트 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와인 마시며 회의… "포도주에 진리 있어"
키징거에겐 ‘돌아다니는 중재위원회’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런 면모는 내각 구성·운영에서 잘 드러난다. 대연정 내각 중 기민당/기사당은 10명, 사민당은 9명이었다. 각자의 면모는 화려했고 이념정파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나치 전력을 가진 총리 키징거, 나치에 저항한 브란트 부총리 겸 외무장관,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베너 내독장관, 강경 우파인 슈트라우스 재무장관, 사회민주주의자인 하이네만 법무장관 등 쉽게 섞이기 힘든 조합이었다. 키징거는 ‘중재의 달인’답게 공공투자, 동방정책 등을 둘러싼 정책 갈등을 타협으로 풀어나갔다. 그의 노력은 남달랐다. 정파 간 화합을 위해 19명의 장관들을 야외로 초대해 처음으로 내각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내각회의에서 이견이 해소되지 않으면 그는 회의를 중단한 채 개별 면담을 요청했다. 회의 도중 그는 자주 밖으로 나갔다. “중재야말로 키징거 정부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라는 게 독일 언론인들의 평가였다.

키징거는 전체 각료회의 말고도 ‘소규모 회의’를 자주 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만나 주요 현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 어울려 와인을 마셨다. 그는 “포도주에 진리가 있어요. 얼마나 달콤한 인생인가!”라고 읊조리곤 했다. 그는 또 ‘경청하는 총리’였다. 그는 항상 내각의 단합을 호소했다. 그 결과 ‘경제 안정과 성장촉진법’(67년), 공공지출 확대 기본법 개정안(69년), 국가 질서와 안정을 위한 ‘비상사태법’(68년) 등 역대 가장 많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연정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키징거는 골치 아픈 대외관계에서도 ‘중재자’를 자처했다. 미국 중심의 대서양주의와 프랑스 중심의 ‘드골주의자’ 사이의 대립을 자신이 완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영국의 유럽공동체(EC) 가입을 놓고 키징거와 드골은 대립했다. 미국과의 외교 마찰도 있었다. 예컨대 그는 미·소 주도의 핵 확산 방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키징거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바로 나치 부역 경력이었다. 총리 후보 때 지식인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는 “이성을 거스르는 자는 총리가 돼선 안 된다”고 선언했다. 보수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 교수도 “조롱과 비방의 대상이 될 것”이라며 총리 취임에 반대했다.

66년 11월 7일 문제의 사건이 터졌다. 베를린의 콩그레스 홀에서 기민당 전당대회가 열린 날, 갈색 단발머리의 29세 여성이 의장석에 몰래 다가가 키징거를 향해 “나치, 나치”라고 외치면서 갑자기 그의 귀싸대기를 갈겼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했고, 맞은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독일 태생으로 파리에 살던 베아테 크라르스펠트였다. 키징거의 고소 취하로 풀려난 그는 학생운동의 순교자처럼 대접받았다. 풍요롭게 자란 전후 세대가 전쟁 세대를 거부한 시대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사회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미첼리히는 『아버지 없는 사회』라는 책을 써 좌파의 주목을 받았다. 기성세대는 나치에 부역한 데다 매사에 권위적이라는 내용이었다. 키징거는 바로 기성세대의 전형이었다. 33년 나치에 가입해 전쟁 기간 중 외무부 라디오정책국 부국장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서다. 외무부에서 일했던 귄터 딜은 “키징거는 나치와도 타협했다”고 평가했다.

나치 부역 경력 탓에 손가락질 받기도
60년대 독일에서도 새로운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미국과 유럽이 중심이었지만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에선 대학을 중심으로 흑인인권운동을 지지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가 확산됐다. 밥 딜런과 WHO의 음악을 들으면서 성 해방을 주장하던 섹스 웨이브(sex wave) 시대였다. 대학생들에게 체 게바라, 마오쩌둥과 호찌민이 새로운 우상으로 등극했다. 독일 젊은이들 역시 이런 물결에 뛰어들었다.

국내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를 틈타 극우세력(NDP)이 지방의회에 진출한 것이다. 대연정에 반대하는 급진좌파 원외세력(APO)들의 활동이 거세졌다. 67년 6월 베노 오네조르크라는 학생이 시위 도중 숨지면서 ‘68세대’ 운동이 격화됐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평화롭던 시위가 곧 폭력적으로 변질됐다. 시위대는 우파 신문인 빌트지 편집국을 습격했다. 그중 일부는 동독 공산정권의 지원을 받는 ‘적군파’(RAF)’로 변신해 테러를 자행했다. 극좌·극우에 맞서 키징거의 대연정 내각은 ‘비상사태법’을 통과시켰다. 진보의 우상이었던 빌리 브란트도 나섰다. 그는 “독일이 세계 정치의 스승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며 폭력 시위를 나무랐다. 과격 테러 탓에 학생운동은 약화되고 재야 운동도 스스로 붕괴됐다. 일부는 지하로 숨어들고, 일부는 사민당으로 흡수됐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69년 총선이 가까워지며 대연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원하고 있었다. 독일 사회의 현대화와 새로운 변화의 물결 앞에서 키징거는 과도기의 보수적인 총리일 뿐이었다. 사민당은 ‘동방정책’을 통해 보수세력과의 차별성을 추구했다. 사민당의 두뇌이자 빌리 브란트의 책사였던 에곤 바가 제기한 ‘접근을 통한 변화’가 시작됐다. 동독 정부를 인정하되 동유럽권 외교를 통해 체제 변화를 도모하는 정책이었다.
키징거는 이런 구상에 적합한 리더가 아니었다. 후임자 빌리 브란트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키징거는 재임 기간이 3년도 안 되는 최단명 총리였다. 일부 언론에선 키징거를 ‘잊혀진 총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연정은 독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권으로 평가받는다. 경기안정법, 비상사태법 등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436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경제 안정을 되찾고 사회복지정책의 가이드라인을 정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선 68, 69년 성장률이 연 7~8%로 회복되고, 물가상승률도 연 1.5%로 낮아졌다. 실업자 수는 6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감소해 기업들은 오히려 구인난 시대를 겪어야 했다. 연방 예산은 15억 마르크 흑자를 기록하며 공공채무가 크게 감소했다. 미국·프랑스 관계에서도 정상 궤도를 되찾았다. 이 모든 게 대연정과 함께 키징거의 ‘중재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글 싣는 순서

1 콘라트 아데나워(기민당)
건국의 아버지, 현실주의 리더십

2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기민당)
낙관주의 리더십, 라인 강 기적의 주역

3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기민당)
중재 리더십, 대연정 실현

4 빌리 브란트(사민당)
비전 리더십, 동방정책

5 헬무트 슈미트(사민당)
마도로스(선장) 리더십, 복지국가 정비

6 헬무트 콜(기민당)
동물적 본능의 리더십, 동서독 통일

7 게르하르트 슈뢰더(사민당)
스마트 리더십, 사회·경제 개혁

8 앙겔라 메르켈(기민당)
뚝심·기다림의 리더십, 유럽 중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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