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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탈리아와 동맹, 동남아 점령 나선 일본

‘사이 좋은 삼국’이란 제목의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협정 체결 홍보 엽서. 1938년 소학관(小学館)의 『소학3년생(小学三年生)』에 실린 것이다. 왼쪽이 히틀러, 가운데가 고노에 후미마로, 오른쪽이 무솔리니다. [사진가 권태균]
소설가 김동환(金東煥)이 발행하던 삼천리는 1940년 3월호에 이른바 ‘성전(聖戰) 제4년 기념사’를 게재했다.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은 만주 건국과 함께 굳게 약속되어 있는 예정의 코스였다”고 시작하는 이 기념사는 만주국 창건을 ‘세계 유신(維新)의 제1단계’로 치켜세우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완고한 중경(重慶)정부 및 장개석은 자기의 비(非)를 뉘우칠 날이 올 것이요, 현명한 4억의 민중은 저들의 우(愚:어리석음)를 각(覺)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동환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⑦ 삼국동맹 체결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1940년 2월 제75회 일본 제국의회에서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齊藤融夫)는 일본의 대중국 정책을 강하게 비판해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속기록이 삭제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발언 내용은 전해진다.

1938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는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부의(溥儀)가 이끄는 만주국 같은 괴뢰 정부를 만들어서 그 정부와 협상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남경 점령 직후인 1937년 12월 왕극민(王克敏)을 중심으로 ‘화북 임시정부’를 세웠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일제는 한때 장개석의 정적이었던 왕정위(汪精衛:汪兆銘)를 대표로 새 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방침을 전환했고 1940년 3월 왕정위를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맞서게 했다.

그런데 왕정위 정부가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당근’이 필요했다. 사이토 다카오는 바로 이 ‘당근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사이토는 ‘중국에 대해 영토나 보상금을 요구하지 않고, 경제상 독점도 요구하지 않으며, 내몽골 부근 이외로부터 일본군이 철수한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은 뒤 “수만 명의 영령과 1백 수십 억의 전비를 희생한 대사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해도 좋은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한마디로 ‘뭐 하러 전쟁했느냐’는 비판이었다.

1 중일전쟁 전비 조달 채권. 1940년 중일전쟁 장기화로 일본은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2 화북의 항일벽화. 일본군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에 일본 군부가 ‘성전(聖戰)을 모독했다’고 사이토를 비판하자 군부의 거수기로 전락한 의회는 사이토를 제명했다. 하지만 사이토의 질문은 성전이란 현란한 구호 뒤에 감춰진 중일전쟁의 모순을 그대로 폭로한 셈이었다.

일본, 독·소 불가침조약에 경악
1939년 8월 23일 독일의 히틀러는 소련의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1936년 일본과 독·일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이탈리아까지 포함하는 독·이·일(獨伊日)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그런 히틀러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니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은 좌우 전체주의 수괴들이 서로 손잡은 세기의 사건이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한 코민테른을 통해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파시즘에 대항해 부르주아지 및 지주와도 손을 잡으라는 ‘반파쇼 인민민주주의 전선’을 강요해놓고 자신은 파시스트 수괴 히틀러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에는 폴란드 및 동유럽을 소련과 독일이 분할한다는 비밀의정서가 첨부돼 있었다.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히틀러는 폴란드에 눈독을 들였는데 폴란드는 이미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남은 변수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소련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소련을 묶어둔 채 영국·프랑스와 전쟁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여러 차례 조약 체결을 권유했고, 스탈린이 “불가침조약이 우리 양국 간 정치관계 개선에 결정적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친서를 보냈던 것이다.
비밀의정서에 따라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서쪽을 침공했고, 소련도 같은 달 17일 폴란드 동쪽을 침공해 폴란드를 나눠가졌다. 독일은 내친김에 1940년 4월부터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했다. 또한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덩게르크 해안에서 연합군 주력 부대를 패퇴시켰다. 독일군은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쫓아 6월 14일 파리를 점령했고, 6월 17일 프랑스 페탱은 비시에서 신정부를 수립해 그날로 독일에 항복했다.

일본은 독·소 불가침조약에는 경악했지만 독일의 눈부신 서전 승리에 도취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1940년 7월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후미마로를 다시 총리로 선택했고, 고노에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전쟁기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A급 전범으로 처형) 등 군부와 사전에 논의해 7월 26일 ‘기본 국책요강’을 결정했다.

기본 국책요강은 “세계는 이제 역사적 일대 전환기에 처해 있다”며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천명했다. 8월 17일에는 ‘세계 정세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 요강’을 결정했는데 그 골자는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결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파시스트 연합전선’을 구축하겠다는 뜻인데, 이는 1939년 1월 히라누마 기이치로(沼騏一郞) 내각 때 히틀러가 이미 제의했던 내용이었다. 당시 일본이 선뜻 가담하지 못했던 이유는 ‘한 동맹국이 전쟁할 경우 자동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영국이나 미국과 전쟁할 경우 일본도 즉각 참전해야 할 의무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비밀조약이 말해주는 것처럼 미국의 지지가 있었다. 그래서 영·미와의 전쟁에는 일본 내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일본 군부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독·이·일 협정체결에 관한 대본영 육군부의 의견’이란 문서를 올려서 “본 협정은 원래 차기 세계대전에 대비… 이런 정치전략상 소련과 영·미를 격파하는 것이 차기 대전의 근본 방침임과 동시에 동아(東亞)신질서 건설에 부과된 문제”라면서 동맹 체결을 주장했다. 일본 군부와 우익 세력들은 히틀러의 승전을 자신의 승전으로 착각한 채 “이러다가 버스를 놓치겠다”면서 동맹 체결을 목청 높여 주창했다.

친미·친영파였던 추밀원 고문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가 “독일과 조약을 맺어서 이익 본 나라가 없다… 일본과 방공협정을 체결해 놓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반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1940년 9월 27일 ‘독·이·일 삼국동맹’이 체결되었다.

日 인도차이나 점령 뒤 美 압박 거세져
조약의 주 내용은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을 확인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이 아시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또는 유럽 전쟁에 현재 참가하고 있지 않은 국가가 동맹국의 어느 나라를 공격할 경우 삼국은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방법에 의거해 서로 원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현재 참가하고 있지 않은 국가’란 미국을 뜻했다.

반면 소련에 대한 내용은 누락되었다. 삼국동맹 체결 5개월 전인 4월 13일 일본과 소련이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영향도 있었지만 상부 명령 없는 진격이 장기였던 일본군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소련에 대한 내용을 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41년 6월 히틀러가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침공했어도 천하무적이라고 자랑하던 만주의 관동군은 얼어붙어서 꼼짝하지 못했다. 노몬한에서 소련군에게 혼쭐난 일본군은 북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아직 싸워보지 않은 미국과 붙어볼 생각에 남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삼국동맹 체결 직전 일왕 히로히토는 “만일 미국과 전쟁해야 할 경우에 해군은 어떠한가? 도상 연습 때 미·일 해전에서 좋지 않은 성적이 나왔다는데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해군대학에서 실시한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해군은 미 해군에 번번이 패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동맹을 문제 해결의 만능키로 여긴 일본은 1940년 9월 23일 중국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 지원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이때도 일본군의 장기인 상부 명령 없는 무단침공이었다. 당초 일본은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 페탱 정부와 협상해서 베트남에 무혈 입성할 계획이었고, 페탱 정부는 승인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참모본부 제1부장 도미나가 교지(富永恭次)는 남지나(南支那)방면군 사령관 안도 리기치(安藤利吉:패전 후 중화민국 정부에 억류 후 음독자살)에게 먼저 진격할 것을 권유했고, 총격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또다시 전 세계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1941년 1월 안도 리기치를 잠시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가 같은 해 11월 대만군 사령관으로 복귀시키고 대만총독도 겸임시켰다. 후일담이지만 1945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제4항공군 사령관 도미나가는 마닐라에서 참모들과 기생들, 위스키 등을 비행기에 싣고 안도가 총독으로 있는 대만으로 도주했다. 지휘관을 잃고 버려진 1만4000여 명의 병사는 대부분 전사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자 미국이 강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1940년 7월 항공기용 가솔린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9월에는 고철과 철강 수출을 금지시키자 일본 내에서 전쟁불사론이 불거졌다. 드디어 이시하라 간지가 ‘세계최종전쟁론’에서 예상한 대로 일본과 미국의 최후 결전이 다가온 것이다. 세계최종전쟁론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은 물론 소련도 다 쓰러뜨리고 마지막 남은 미국과 세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아직 소련은커녕 중국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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