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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고도 실패한 백단대전, 마오는 침묵했다

총참모장 시절 원수 네룽전(聶榮臻)과 함께 소련의 핵 기지를 비밀리에 방문한 황커청(가운데 왼쪽).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펑더화이와 함께 몰락했다. [사진 김명호]
루쉰(魯迅·노신)의 잡문인지 산문인지 가물가물하다. 제목도 잊었지만 내용은 대충 기억이 난다. 자손 귀한 집안에 손자가 태어났다. 축하객들이 몰려왔다. 집주인은 애를 안고 사람들 앞을 한 바퀴 돌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백 살을 살겠다. 장차 왕후장상이나 큰 부자가 되고도 남겠다”며 덕담을 늘어놨다. 모두 불확실한 말이었지만 주인은 기분이 좋았다. 싱글벙글하며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09>

앞에 사람들이 온갖 좋은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제일 끝자락에 있던 사람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애를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애도 언젠가는 죽겠군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집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붉으락푸르락, 주위 사람들이 “별 주책바가지 다 보겠다”며 내쫓아도 모른 체했다.

루쉰의 글 중에서 이 과장되고 짓궂은 글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유난히 많다. 이유도 한결같다. “확실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은 사람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진실을 말한 사람은 쫓겨났다.”

여산회의 3년 전인 1956년 11월,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가 말단 군부대를 시찰한 적이 있었다. 9개월 전, 인민해방군 총참모부와 정치부 명의로 반포한 군인의 맹세(軍人誓詞)가 가는 곳마다 붙어 있었다. 시작이 “마오 주석의 영도하에 우리는…”이었다.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펑더화이가 수행원들을 보고 씩 웃었다. “다들 큰 병에 걸렸다. 국가의 군대지 당이나 개인의 군대가 아니다. 주석이 죽으면 누가 군인들을 지휘한단 말인가. 우리는 유물론자다. 하루빨리 뜯어고쳐야 한다.”

여산회의 6개월 전, 후근(후방)대학 졸업식에서도 쓴소리를 했다. “허구한 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야 하니 심신이 고달프다. 가는 곳마다 만세 소리가 요란하다. 듣기엔 좋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만 년을 사는 사람은 없다. 육체가 정신을 상대해야 하니 죽을 지경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당시 중국은 개인숭배의 시대였다. 마오쩌둥은 알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 두 사람의 인연은 징강산(井岡山)에서 시작됐다. 1928년, 핑장(平江)에서 폭동을 일으킨 펑더화이가 무장병력을 이끌고 입산했다. 융싱(永興)폭동의 주도자 황커청(黃克誠·황극성)의 극진한 영접을 받았다. 폭동을 일으키고 도망 와있던 마오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기까지 30년간, 마오와 펑더화이 사이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은 항상 펑더화이가 먼저 저질렀다.

입산 1년 후, 국민당군이 징강산에 맹공을 퍼부었다. 펑더화이의 실책으로 홍군은 징강산에서 퇴각했다. 펑더화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지만 마오는 예외였다. “펑더화이는 맹장이다. 이기기만 하는 전쟁은 없다. 패해도 이긴 것 같고, 이겨도 진 것 같은 것이 전쟁”이라며 펑더화이를 감쌌다. 수십 년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펑더화이가 위안원차이(袁文才·원문재)와 왕쭤(王佐·왕좌)를 처형했을 때 마오쩌둥은 당황했다. 두 사람은 마오가 오기 전까지 징강산의 지배자였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징강산 혁명 근거지’는 불가능했다. 징강산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홍군을 원망하고도 남을 행동이었지만 마오는 펑더화이를 추궁하지 않았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펑더화이도 마오쩌둥의 군권 장악과 유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마오는 툭하면 펑더화이에게 시(詩)를 통해 대장군(大將軍) 칭호를 선물했다.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홍군은 팔로군으로 개편됐다. 팔로군 부총사령관에 임명된 펑더화이는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백여 개 여단을 동원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을 준비하면서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투를 시작한 후에야 건성으로 보고했다.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백단대전은 펑더화이와 팔로군의 위력을 세계에 떨친 전쟁이기는 했지만 팔로군의 전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후유증이 컸다. 국민당군을 향하던 일본군의 총부리가 팔로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숨통을 튼 장제스는 팔로군을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국공 합작도 금이 갔다.

전쟁 3년 후, 백단대전 평가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펑더화이를 비판했다. “전쟁은 별게 아니다. 적을 방심시킨 후 허점을 치면 된다. 1940년, 펑더화이가 지휘한 백단대전은 우리의 군사력을 스스로 노출시킨 전쟁이었다. 이겼지만 사상자가 많았고 전력을 가다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백단대전을 계기로 적들이 우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펑더화이도 실패를 인정했다. “겉으로는 이겼지만 정치적으론 실패한 전쟁이었다. 국민당만 앉아서 득을 봤다.” 이때도 마오쩌둥은 침묵했다. 인간은 모순투성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가끔 있어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마오쩌둥도 완인(完人)은 아니었다. 내색만 안 했을 뿐, 펑더화이에게 쌓인 응어리는 풀 수 없을 정도가 돼버렸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참전을 결정한 마오쩌둥은 지휘관 선정을 놓고 밤잠을 설쳤다. 국공전쟁 시절 화동야전군을 지휘했던 쑤위(粟裕·속유)는 입원 중이었고, 멀쩡하던 린뱌오는 갑자기 환자로 변했다. 마오는 시안(西安)에 있던 펑더화이를 호출했다.

펑더화이는 군말 없이 수락했다. 22년 만에 처음으로 마오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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