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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바보야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2007년 5월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은 서울 혜화동 집무실에 종이를 펼쳐 놓고 앉았다. 한진만 홍익대 교수, 신현중 서울대 교수 등이 동성중고 100주년 기념전 준비를 도와달라며 그림을 청한 참이었다. 추기경은 동성중고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를 1941년 졸업했다. 화가·조각가 동문 후배들이 검은색 오일스틱을 건넸다. 추기경은 옛집, 산, 국화 등을 소략하게 그렸다. “자화상도 한번 그려보시죠”라는 요청이 있자 동그란 얼굴에 눈·코·입을 그리던 끝에 문득 ‘바보야’라고 적었다. 추기경은 이때 자화상을 처음 그려봤다고 했다.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다섯 달 뒤, 동문회에선 100주년 기념전을 알리고자 신문사에 전시 도록을 보내왔다. 쟁쟁한 미술가들의 작품도 많았지만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바보야’ 자화상이었다. 중앙일보는 다음날 신문 1면에 이 그림을 실었다. 반향이 컸다. 추기경께 그 의미를 직접 여쭙자는 제안들이 나왔다. 기자는 천주교 신자도, 종교 담당도 아니어서 그와 연이 없었다. 주최 측에선 건강상 이유로 추기경의 전시 개막식 참석 여부가 불투명하다 했지만 일단 가봤다. 덕분에 거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추기경을 만날 수 있었다. 짐작은 갔지만 “자화상에 왜 ‘바보야’라고 쓰셨나” 여쭈었다. 당사자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게 우리의 일이니까.

김수환, 자화상, 종이에 오일스틱.
그는 머뭇거리다 불쑥 반문했다. “바보 같지 않나요” 하고.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선종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천주교는 ‘바보 자화상’ 스티커를 제작해 배포했다. 1주기엔 그의 뜻을 기려 ‘바보의 나눔’이라는 이름의 모금 재단법인이 출범했고, 2주기엔 그의 일생을 다룬 전기 다큐멘터리 ‘바보야’가 나왔다. 성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바보, 평생 처음 그린 자화상으로 그는 ‘바보같이 살자’는 화두를 남겼다.

 6년 전의 그 전시장에선 이런 질문도 했다. “어떤 삶이 괜찮은 삶인가요.” 그는 “그거야 누구나 아는 얘기”라며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이웃과 화목할 줄 알아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걸 실천하는 게 괜찮은 삶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렇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내일모레는 그의 4주기다.

권 근 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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