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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내 속에 있는 나에게 말 걸기

엄을순
객원칼럼니스트
대문 앞에 놓인, 눈이 소복하게 덮인 박스. 눈을 털어내니 한라봉 선물세트가 얼굴을 내민다. 서울에 볼일 보러 간 사이에 택배 아저씨가 놓고 갔나 보다. 엊그제 고맙다고 문자까지 보낸 사람이 그새 선물까지 또 보낸 걸 보면 그에게 내가 고맙긴 많이 고마웠나 보다.

 밥 먹고 하는 일이 남의 고민 들어주는 일이지만, 대부분은 여자들 고민이지 남자 고민 듣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얼마 전. 한 달에 한번 만나는, 일 년 된 어떤 모임에 나갔다.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고민을 어깨에 얹고 사는 것같이 우울해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요즘 힘드시죠?’ 하고 말 한마디를 건넸다. 직업의식인지 습관 때문인지 난 가끔 그런 짓을 잘 한다. 그런데 그 남자의 반응은 의외였다. 얼굴도 몇 번 보지 않았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서 슬슬 고민 보따리를 풀어놓는 거였다. 사업, 친구, 심지어는 가족 얘기까지. 한참을 흥분하며 말을 하더니 문제 해결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이상도 하여라. 내가 그에게 한 말은 ‘세상에, 그렇겠네요, 사는 게 다 그렇지요’가 다였는데 그는 나보고 해결해줘서 고맙단다. 아마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일 게다.

 남자도 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면 수다쟁이가 된다는 걸 그때 새삼 알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고민이 생기면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시시콜콜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다. 허접한 얘기부터 마음속 은밀한 얘기까지. 하지만 남자들은 혼자 끙끙 앓거나 삭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던데. 아프다고, 힘들다고, 어렵다고 말하는 순간, 경쟁사회에서 잡아먹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그를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이란 점 때문에 그가 내게 쉽게 고민을 털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민이란 것이 입 밖으로 꺼내놓자마자 그렇게 다 해결이 된다면, 굳이 고민 들어주는 대상이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머지않아 고민 들어주는 로봇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로봇 대신에 혼자 하는 글쓰기는 어떨까. 일기 같은 것 말이다. 자신의 감정을 어느 누구보다 충분히 귀 기울여 주고 공감해 줄 사람 중에 ‘내 속에 있는 나’만한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몸이 아파서 병을 치료하려면 제일 먼저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아픈 부위를 다 까발리고 보여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파서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스스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누군가에게 밖으로 다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상처를 보이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아픈 부위를 보이는 게 훨씬 쉬울 게다. 그렇게 하면 후회할 일도, 소문날 일도 없을뿐더러 자존심도 상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것, 자기 자신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 아닌가.

 오랫동안 꾸준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 『치유의 글쓰기』의 저자 셰퍼드 코미나스는 ‘글쓰기는 일상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길’이라 하면서 ‘글쓰기 습관에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 최고의 자기 배려’라 말하고 있다.

 흔히들 말한다.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사랑하라고. 우리도 그거 다 안다. 하지만 마음대로 잘 안 되는 이유는 내면에서 줄곧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마음의 앙금과 억압들이 ‘자기 사랑하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구정도 지났다. 지금부터가 진짜 새해다. 새해가 됐다고 여기저기 유명하다는 점집 찾아다니며 고민 해결하려 들지 말고 일기를 쓰자. 고민을 속으로만 삭이는 남자들에게는 특히 인생의 위기를 다스리는 제일 좋은 방법일 게다.

 자기 속에 있는 어떤 생각이나 경험이나 느낌들을 꺼내어, 학창 시절 일기를 쓰듯이, 혹은 종이에 낙서하듯이 편하게 시작하자. 이것이 ‘자기 사랑하기’의 시작이다.

 단, 마음에 담아두었던 자기 속을 마음껏 쏟아내려면 철저한 보안은 필수다.

 아픈 자식을 돌보다가 내친김에 뒤늦게 의사시험 치르고 의사됐다는 사람도 있던데, 치유를 위한 글쓰기 하다가 내친김에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될 사람 많겠다.

엄 을 순 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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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