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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디자인은, 잘 멈추는 것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은 디자이너의 덕목으로 ‘절도(節度)’를, 좋은 디자인의 요건으로 ‘멈춤’을 강조했다. 창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최성민(42·오른쪽) 씨의 손 그림자가 비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복궁 인근인 서울 창성동의 빨간 벽돌 건물 3층,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학원생 느낌이 나는 남녀가 한눈에 들어왔다. 슬기와 민, 요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듀오다. 최성민(42) 서울시립대 교수와 최슬기(36) 계원예대 교수가 성을 떼고 이름을 합쳐 한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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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서울대·중앙대를 졸업한 그들은 예일대 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만났다. 몇 차례의 공동 작업 끝에 의기투합해 결혼,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의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로 또 한 차례 유학을 떠났다. 지금은 경기도 수지에서 딸(8)을 키우며 함께 작업실로, 혹은 각자의 학교로 출퇴근한다.



 2005년 귀국한 두 사람은 출판사 ‘스펙터(Specter) 프레스’를 설립했다. 박미나·홍승혜·잭슨홍 등 미술가들과 협업해 책을 만들기도 했다. 2006년 서울 갤러리팩토리에서 연 첫 단독전으로 그 해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받았다.



 일반에 알려진 이들의 작품은 ‘페스티벌 봄’ 포스터(2010∼2012)다. 매해 새로운 실험을 했다. 과감한 커팅으로 사람의 손 동작을 강조한 흑백 작품을 선보였고, 남산 인근의 매연 자욱한 하늘에 ‘봄’(페스티벌 봄)이 오고 있음을 시각화한 사진도 시도했다. 눈에 덜 띄는 일관된 글자체도 특징이다. 매년 봄 서울서 열리는 국제다원예술제인 이 행사의 정체성을 살렸다.



 리스본 디자인 비엔날레(2011)에는 공사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모양 인형 두 점을 출품키도 했다. 제목은 ‘어서오세요/안녕히가세요/어서오세요/안녕히가세요’다. 최씨는 “로봇 덕에 공사장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이 잉여가 된 형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해 비엔날레 주제가 ‘잉여와 반복’이었다”고 설명했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BMW 구겐하임 연구소’ 아이덴티티. 홈페이지에 접속한 이들이 훌륭한 도시를 위한 아이디어를 입력하면 해당 문구가 ‘LAB(연구소)’이라는 전체 형태에 반영된다.


 2010년엔 독일 BMW와 미국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 조직한 실험적 문화공간 ‘BMW 구겐하임 연구소’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선정돼 이 연구소를 상징하는 아이덴티티(identity) 디자인을 맡았다. 지난달 31일 만난 이들은 인터뷰 중에도 낯을 가리며 거리를 뒀다. 절도(節度)와 멈춤을 거듭 강조했다.



 -누구나 디자인, 디자인 하는데.



 “우리들에게 디자인은 ‘심각한 취미’다.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는 게 취미라면 내게는 일이 그렇다. 일할 땐 세상 다른 걱정 다 잊을 수 있다. 사실 딱히 취미도 없고, 만나는 친구도 별로 없다. 밥 먹고 잠 잘 때 빼곤 일한다. 다른 거 할 때보다 작업할 때가 훨씬 재미있다.”



  -디자이너가 부모가 되니 어떤가.



 “(최슬기) 실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미술 관련 방학 숙제 등 어린이 활동 중엔 그래픽 디자인적 지식을 요하는 일들이 있다. 거기 과하게 개입하거나 심취하지 않으려 애쓴다. (최성민) 창의적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절도 있는 생활이랄까.”



  -절도? 그게 창의적 생활에 도움이 되나.



  “그렇다.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이다. 작업 하나 하고 끝낼 인생이 아니지 않나. 지속 가능한 창작에 중요한 요소다. 아이가 생기기 전엔 생활 패턴이 엉망이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깨고. 맺고 끊기가 안 되면 돈키호테처럼 상상의 문제를 만들어 가공의 적들과 싸우게 된다. 이젠 더 이상 작업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좀더 냉정해지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강북의 신문화공간으로 각광받는 서촌에 자리잡았건만 이들의 작업실은 여느 디자이너들의 잘 정돈된 공간과는 달랐다. 출입문 바로 앞에 시야를 가리고 있는 철제 앵글장엔 스펙터 프레스의 출판물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장 위에 여남은 개 얹힌 노란 두부판 안엔 이들이 디자인한 포스터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도무지 돈을 들이지 않은 이 사무실 창문엔 커튼 대신 대충 말아 붙인 모눈종이가 해를 가리고 있었다. 큰 책상과 몇 가지 간단한 프린트 기기만이 여기가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실임을 겨우 드러낼 뿐, 그나마도 세 명의 다른 이들과 이 66㎡(20평) 공간을 공유해 월세를 아끼고 있다.



 -좋은 디자인이란.



 “제약을 활용하는 것, 적절하고 사리에 맞는 것, 적당한 선에서 멈춘 디자인. 늘 기본을 넘어서고픈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일수록 빨리, 잘 멈추는 것 같다. 우린 그걸 배워나가고 있다.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아이라든가, 다른 주문 등 외부 상황도 여기 일조한다.”



  -듀오로 활동하는 것은 어떤가.



 “상상할 수 있는 장단점이 다 있을 거다. 서로 자극해 뭔가 할 수 있도록 몰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상대를 멈추게 하는 일이더라. 예전엔 못 느꼈었다.”



  -올해 계획이라면.



 “이웃에 출판업도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인 ‘워크룸’이 있다. 이들과 합작해 임프린트 ‘작업실 유령’을 만들었다. ‘워크룸’과 ‘스펙터 프레스’를 합친 이름이다. 디자인·예술 관련 책, 흥미 있는 형식의 책을 낼 거다. 3월쯤 첫 작품이 나온다. 아이소타이프(표준그림부호)에 대한 책으로 최슬기씨가 번역 중이다. 정보 디자인이랄지, 통계·수치를 어떻게 시각화하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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