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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봄까치꽃처럼 미리 봄을 살자

이원규
시인
겨울과 봄의 경계인 절분과 입춘이 막 지났다. 중부 지방의 폭설로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2월 들어서자마자 폭우와 폭설이 교차하는 이상기후처럼 여전히 안갯속인 새 정부, 그리고 남북한과 북·미 간의 날카로운 이상전선이 예사롭지 않다. 설 명절을 앞두고 도대체 마음 둘 데도 없고 몸 둘 곳도 없는 하수상한 시절이다.



 그렇다고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의 소망마저 저버릴 수 있겠는가. 혹자는 “24절기가 중국의 황하 중류지방(낙양·서안)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어서 우리나라 절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얼핏 수긍이 가지만 아무래도 지수화풍의 기운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농경정서의 기본은 계절을 미리 읽고, 계절을 먼저 사는 것이었다. 최소한 가을에 겨울을 준비하고, 겨울에 봄을 준비하며 지혜롭게 살았다.



 이렇게 계절을 미리 산다는 것은 우주조화를 읽을 줄 아는 일이자 순환 질서에 한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현대인들은 생명의 순환질서 속에서 스스로 튕겨져 나와 연속이 아닌 단절, 운율이 아닌 단말마적인 삶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동시대에 살면서도 밤하늘을 보고 비가 올 것을 미리 아는 농부, 바람을 읽고 풍랑의 세기를 예감하는 어부와 전혀 다른 인류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인들의 지식은 엄청나게 깊고 넓어졌지만 더 가벼워졌다. 스스로 자연을 읽고 판단하는 능력은 오히려 퇴화했다. 온갖 미디어에서 반복해 알려줘야 겨우 우산을 챙긴다. 재난경고방송이 울려야 아슬아슬 몸을 피하고, 봄꽃이 피었다고 사진을 보여줘야 호들갑을 떨며 상춘객 채비를 한다.



 진정한 기다림은 목을 길게 빼고 앉아서 혹은 노심초사 서성거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걸어서 마중을 나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하여 나 또한 긴 겨울잠에서 깬 반달곰처럼 겨우 아랫목에서 훌훌 털고 일어났다. 섬진강물을 따라 하염없이 내려가 봤다. 봄기운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청보리와 마늘뿐만이 아니라 시금치와 냉이 등 온갖 풀들이 자라고, 마침내 눈높이를 맞춰 두 무릎을 꿇고 자세히 보니 강변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 봄까치와 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봄은 아주 낮고 작고 여리고 잘 안 보이는 것들로부터 오고 있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겨울의 결기 끝에 ‘여럿이 낮고 다정한’ 어깨동무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최근에 중고로 구입한 접사 렌즈가 이들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아기손톱만 한 연보랏빛 봄까치꽃과 이보다 더 작은 하얀 별꽃들이 조만간 피어날 매화나 산수유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사실 높고 크고 잘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식상한 지 오래다. 마치 표정이 사라진 성형미인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보름 전부터 봄처녀처럼 달뜬 마음으로 날마다 집을 나섰다. 섬진강 하구의 어여쁜 풀꽃들을 보러 갔다. 그런데 며칠 전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서려다 혹시나 하고 녹차밭과 대밭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다 화들짝 놀랐다. 우리 집 아래마당 한쪽이 환했다. 봄까치꽃이 서른 송이쯤 피어있었던 것이다. 산다는 게 늘 이런 식이었다.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놓치고 자꾸 먼 데만 보고, 자꾸 더 먼 곳만 생각했다. 낮은 포복으로 오는 봄의 전령에게 배우고, 오체투지의 자세로 접사 렌즈에게 인생을 배운다. ‘거기가 여기고 그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가 닿아야 할 그곳에 이미 도착하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생태주의의 대표적인 슬로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이는 20세기와 21세기를 가르고, 진정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실로 거대한 성찰의 물결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제아무리 기상이변과 꽃샘추위가 몰아닥치는 ‘춘래불사춘’이라 해도 봄은 기어코 봄이다. 추울수록 웅크리지만 말고 고로쇠나무의 수액처럼 우리의 몸속에도 봄물이 오르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청명이나 곡우가 돼야 봄인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늦었다. 해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봄날은 간다’를 한탄 조로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농부나 어부처럼 미리 봄을 살아야만 온몸 그대로 봄이 되고, 내가 먼저 한 송이 풀꽃을 피워야만 비로소 어깨동무가 된다. 좀 춥더라도 이번 설날부터는 미리 봄을 살자.



이 원 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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