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신선회<神仙會>’ 덮친 먹구름 … 대약진 운동 평가 놓고 긴장감

펑더화이(왼쪽)와 마오쩌둥. 1953년 가을 베이징(큰사진). 한국전쟁 시절 전선을 시찰하는 펑더화이(오른쪽). [사진 김명호]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시행착오가 많았다. 열정 하나만은 나무랄 게 없었지만, 지나친 좌경화와 맹목적인 게 문제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07>

5월 하순, 중공 중앙은 전국을 뒤덮은 각급 간부들의 좌경 일변도를 시정하기 위해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가 포문을 열었다. “대약진 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내가 보기엔 잘못된 운동이다. 성공 사례라며 숫자만 나열하지 마라. 인민들을 나태하게 만든다.” 마오쩌둥은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평화시대의 군인답다”며 조롱했다. 회의 마지막 날, 두 사람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헤어졌다. 평소와 다르게 싱거운 소리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1952년 봄 개성 인근.
펑더화이는 뭐든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이듬해 봄, 고향 후난(湖南)성의 대약진 운동 실태 조사에 나섰다. 농촌마다 상황이 심각했다. 대장정 시절 부상을 입었다는 홍군 출신 노인이 건네준 편지를 보고는 눈에 핏발이 섰다. “곡식은 거덜나고, 고구마 잎도 말라 비틀어졌다. 청년들은 철공소에 일하러 가고, 애들과 늙은이들이 논밭에서 헉헉거린다. 해가 바뀌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살길이 막연하다. 인민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주기 바란다.” 문혁 시절, 감옥으로 면회 온 조카에게 당시를 회상하며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경험도 없는 주제에 꼴값만 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59년 6월 중순, 마오쩌둥은 7월 2일부터 여산에서 열릴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앞두고 간부들에게 호소했다. “경험을 교훈 삼아 난제들을 해결하자. 사실만 이야기해라. 무슨 일이건 결과가 중요하다. 실속 없이 허풍 떨지 마라. 허위를 사실처럼 꾸미지 마라. 현장 조사를 철저히 해라. 조사를 소홀히 한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 왼쪽으로 치우치지 마라” 등이었다.
마오쩌둥은 회의 명칭도 ‘신선회(神仙會)’라고 직접 지었다. “산 위에서 신선들처럼 노닐며 한바탕 쉬자. 생각이 하나가 되면 하산해서 대약진 운동을 계속하자.”

6월 중순, 동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펑더화이는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황극성)에게 국내 상황을 보고받았다. 시중쉰의 서면보고도 대동소이했다. 아사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중앙정치국원과 국무원의 부장급 간부를 포함한 전국의 당서기들이 여산에 운집했다.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과 부총리 겸 외교부장 천이(陳毅)는 당 중앙과 정부를 지키기 위해 베이징을 뜨지 않았다. 천윈(陳雲)과 린뱌오(林彪)는 병중이었다. 황커청도 여산행을 포기했다.
회의 참석을 위해 베이징을 출발한 마오쩌둥은 여산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곳을 순방했다. 가는 곳마다 대약진 운동을 세 마디로 압축했다. “위대한 성적을 거뒀다(成績偉大), 문제도 적지 않지만(問題不少), 앞날은 밝다(前途光明).” 시(詩)도 두 편 발표하며 타고난 문인 기질을 뽐냈다.

첫 번째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독서, 선전, 체제, 농촌시장 회복” 등 18개 종목을 토론에 부치자고 제의했다. 총리 저우언라이가 국제문제도 포함시키자고 한 것 외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참석자들을 안심시켰다. “향기로워도 방귀고, 냄새가 고약해도 방귀다. 장(腸) 안에 쌓아두면 병만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자. 몸 안에 있는 탁한 기운들을 한번에 쏟아내자.” 마오는 발언을 방귀에 비유하는 습관이 있었다.
신선회라는 말이 어울리는 회의였다. 낮에는 조별로 토론하고 해가 지면 영화관이나 경극 공연장을 찾았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 시를 주고 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부가 함께 온 사람들은 산책과 등산을 즐겼다. 여산의 일출은 장관이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자 두 패로 갈렸다.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성장이나 서기들은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을 옹호했다. “문제점들은 이미 해결됐다. 부정하는 것은 위대한 혁명군중 운동에 찬물을 뿌리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과 교훈만 강조하다 보면 결점만 드러난다”며 간부들의 허황된 백일몽과 공산주의 풍조를 비판했다. 여산 하늘에 풍운이 몰아칠 징조였다. (계속)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