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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 몽골 넘보다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혼쭐

노몬한의 소련군 탱크부대. 노몬한 전투는 과대포장 되었던 일본군의 진짜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진가 권태균]
일본이 국민정부 수도인 남경(南京)만 함락하면 전 중국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만주국 학습효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 본토는 전혀 달랐다. 일본군이 1937년 12월 남경을 함락시켰지만 장개석은 내륙 깊숙한 중경(重慶)을 임시수도로 선포했다. 정부기관을 양자강 유역의 한구(漢口)로 옮겨놓고도 중경을 수도로 선포한 것은 한구가 점령당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국민당 주력군은 한구를 중심으로 하는 무한삼진(武漢三鎭:한구·무창·한양)에 포진해 일본군과의 결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⑤ 북방정책서 남방정책으로

국공합작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섰지만 양당의 처지는 판이했다. 모택동은 ‘지구전에 대하여(論持久戰)’에서 장개석이 진지전(陣地戰)을 전개했다고 비판했지만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이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부터 갈 수는 없었다.

반면에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된 홍군(紅軍)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모택동의 유명한 16자 전법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敵止我搖), 적이 피곤해하면 우리는 타격한다(敵疲我打),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공격한다(聲東擊西)’의 16자 전법은 공산당의 역량을 보존하면서 일본군의 진을 빼놓는 전략이었다.
팔로군 총사령 주덕(朱德)의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소요를 일으킨다(敵駐我騷), 적이 후퇴하면 쫓아간다(敵退我追)’는 전략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공격하면 공산당군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그래서 주둔하면 주위가 소란한 운동전(運動戰)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후퇴하면 곧바로 공산당군의 진지가 되어버렸다.

日 배상금 요구로 ‘트라우트만 조정’ 결렬
중국 점령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일본군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참모본부는 모처럼 자존심을 접고 강화협상에 나섰다. 1937년 말 ‘트라우트만 조정(調停)’이라고 불리는 재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Oskar P. Trautmann)의 화평공작이 그것이다. 참모본부 차장 겸 육군대학 교장이었던 다다 하야오(多田駿)와 이시하라 간지 등이 화평공작에 적극적이었다. 다다 하야오도 1938년 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 사령관을 맡았다가 패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지만 이때는 군부 내 불확전파의 중심인물이었다.
트라우트만의 중재로 장개석의 국민정부와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정부 사이에 강화협상이 전개되어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노에가 느닷없이 중국 측에 ‘배상’을 요구했다. 남경학살까지 자행한 일본에 배상금까지 쥐여주면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트만 조정’이 1938년 1월 15일 결렬된 배경이다.

고노에는 다음날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참모차장 다다 하야오가 “보통은 강경해야 할 참모본부가 오히려 겁을 먹었고, 소극적이어야 할 정부가 강경한 것은 정말 기괴하게 느껴진다… 정부는 중국을 가볍게 보고 만주국의 외형만 보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는 수기를 남긴 것처럼 강화회의를 주도해야 할 고노에가 ‘짝퉁 이시하라’의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고노에는 패전 후 펴낸 자기변명서인 잃어버린 정치(失まれし政治)에서 “일본제국 정부가 중국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일본제국과 제휴하기에 걸맞은 신흥 정권의 수립과 발전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런 후에 양국 국교를 조정하자는 성명이었다”고 고백했다. 부의(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을 건립한 것처럼 다른 한간(漢奸)을 내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한 후 국교를 새로 맺으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남경 점령 다음날인 1937년 12월 14일 북평(北平:북경)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의 왕극민(王克敏:1945년 패전 후 옥중 자살)을 정부(政府)위원장, 도쿄제대 의학박사 출신의 양이화(湯爾和:1878~1940)를 의정(議政)위원장으로 삼은 이른바 중화민국 임시정부(화북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이 정부는 1940년 3월 20일 남경에서 국민정부의 제4기 행정원 원장(1932~35)이었던 왕정위(汪精衛:汪兆銘)를 주석 겸 행정원 원장으로 삼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로 개편되었다.

1 노몬한의 일본제 89식 전차. 2 노몬한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 노몬한 전투의 주력부대인 일본군 23사단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중국민에게 이 정부들은 일제의 괴뢰정부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협상이 결렬된 채 전선이 고착화되자 일본은 드디어 1938년 8월 한구(漢口) 진격 명령을 내렸다. 한구를 점령하면 전 중국을 지배하리라는 망상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한구 진격은 일본군의 전 역량을 동원한 것이었다. 지나파견군 하다 슌로쿠(畑俊六:패전 후 전범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대장 산하에 히가시(東九邇稔彦:왕족, 패전 직후 총리 역임) 중장이 이끄는 제2군 소속 3개 사단과 오카무라(岡村寧次) 중장이 이끄는 제11군의 3개 사단 외에 지나파견군 직할 4개 사단, 1항공군단, 1기병여단 등 모두 30여만 명으로 구성된 대부대였다. 그러나 이런 대부대를 동원했음에도 일본군은 10월 25일 중국군이 철수하고 나서야 겨우 한구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한구 함락 소식에 일본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전국적으로 축하 제등행렬이 이어졌다. 일본인들은 이제 중국을 다 점령한 것처럼 들떴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모택동은 6개월 전인 1938년 5월 말 연안(延安) 항일전쟁연구회에서 ‘지구전에 대하여(論持久戰)’란 유명한 연설로 일본군의 이런 기대에 코웃음을 쳤다.
모택동은 “중일전쟁은 지구전이고 종국적 승리는 중국의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지구전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제1단계는 적이 전략적으로 진공하고 우리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시기이며, 제2단계는 적이 전략적으로 수비를 하고 우리가 역공을 준비하는 시기, 제3단계는 우리가 전략적으로 공격하고 적이 전략적으로 퇴각하는 시기”라고 나누면서 아직 1단계도 끝나지 않았다고 갈파했다. 종전은커녕 본격적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모택동의 말대로 무한을 점령했지만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즉 지구전에 빠져버린 것이다.

주코프 이끈 제57군단, 화력 앞세워 승리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노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39년 5월 만주 서북부 노몬한에서 소련과 충돌한 것이다. 참모차장 다다 하야오나 작전부장 이시하라 간지가 확전을 반대했던 것은 소련 때문이었다. 만주국은 소련 및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몽골인민공화국과 무려 4000㎞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던 소련은 국경선을 새로 획정하지 않고 청나라 때 국경선을 고수했다.
일본 육군 지도부는 몽골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기 때문에 관동군에 가능하면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짝퉁 이시하라 간지들이 득실거렸던 관동군에선 여차하면 소련과 붙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몽골은 만주 서북부 호롱바일 초원 전부를 영토라고 여겼지만 만주국은 10~20km 정도를 더 차지하는 하루하 강을 국경으로 여겼다. 그래서 충돌한 것이 노몬한 사건인데 1939년 5월의 제1차 사건과 7월의 제2차 사건으로 나뉜다.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전쟁기계인 제23사단장 고마쓰하라 미치타로(小松原道太郎) 중장은 "몽골병사 700명이 국경을 침범했다"면서 23사단을 진격시켰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 대비하던 스탈린은 독일과 붙기 전에 일본의 콧대를 꺾을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게오르기 주코프를 제57군단장으로 임명해 싸우게 했다.
병력 숫자는 일본이 많았지만 중화기는 소련이 우세했다. 기세 좋게 하루하 강을 건넜던 무적(?)의 관동군 23사단은 전사 7700여 명, 전상(戰傷) 8600여 명, 부상 2300여 명으로 2만여 병력 중 3분의 2 이상이 손실되어 사단 자체가 와해되었다. 제3전차연대 요시마루(吉丸) 대좌는 전사하고, 전차 보병 64연대장 야마가타 대좌와 수색 제23연대장 이오키 중좌가 자결하는 등 대부분의 연대장이 죽고 말았다. 소련도 8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소련과 몽골의 의도대로 호롱바일 초원 전부가 몽골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결국은 일본의 패배였다. 한마디로 관동군의 실제 전력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9월 16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와 참모장 이소가이 렌스케(磯谷廉介) 중장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그러나 정작 노몬한 전투를 기획했던 관동군 작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服部卓四郞) 중좌는 육군보병학교로 전근되었다가 1940년 10월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영전했고, 같이 확전을 주장했던 쓰지 마사노부(辻政信)도 참모본부로 부임했다.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호되게 당한 이들이 미국·영국과 맞서는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태평양전쟁의 발단이었다. 윗동네를 기웃댔다가 크게 혼난 조직폭력배가 아랫동네를 노리는 식으로 나라의 운명이 흘러가는 이상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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