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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의 미묘한 어긋남 깊고도 넓은 울림

1969년생, 40대 중반으로 향하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특정 레퍼토리의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일도 없다. 프랑스 액상프로방스 출신이지만 이탈리아·코르시카·알제리·유대계 등 다양한 혈통을 물려받았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균질하게 분포하는 그녀의 이 같은 태생적 특성은 연주에서도 마찬가지로 구현되는 듯하다. 연주하면서 그녀는 흩뿌리는 피아노 음을 이루는 갖가지 재료의 비율을 일치시킨다. 악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자기 안에서 해체한 뒤 분배(기계적인 분배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을 거쳐 다시 그려낸다. 정밀한 디지털 사진이 아니라 기억을 부여잡고 붓으로 그리는 회화에 비유할 수 있는 작업이다.

엘렌 그리모 피아노 리사이틀, 1월 29일 예술의전당

그는 20년이 훨씬 넘는 리코딩 경력을 가진 중견 피아니스트다. 10대 때인 1985년 덴온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한 이후 에라토, 텔덱, 도이치그라모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녹음했다.

그리모는 1월 29일 예술의전당에서 자신의 음반 ‘레조낭스(Resonances, 공명, DG)’를 그대로 재현하며 3년 만의 내한공연을 치렀다. 쇼팽, 베토벤, 바흐 등에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재조명한 그녀의 스타일을 한때의 사진처럼 남긴 무대였다.

사진 크레디아
붉은색에 은색 문양이 들어간 치파오 상의에 헐렁한 검은 바지 차림의 엘렌 그리모가 무대로 나왔다. 미모의 소유자이면서도 여성성을 굳이 강조하지 않는 그녀다웠다.

음반과 마찬가지의 순서로 진행된 공연, 첫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K310이었다. 그는 적극적인 몸짓으로 셈여림을 균형 있게 분할하며 하프시코드(피아노가 나오기 전 주로 사용된 건반악기)에서 얻어낼 수 있는 효과를 추구했다. 페달을 부지런히 밟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그 결과 울림이 풍성하게 피아노를 에워쌌다. 이런 상태로 질주하다가 관성에 이끌려 속도를 자유자재로 늦추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는 작품을 완전히 자신의 수중에 넣지 못한 것으로도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거대한 쇠구슬이 언덕 밑으로 굴러가는 것을 쉽게 멈출 수 없는 것처럼 1악장은 흘러갔다.

투명한 타건과 풍성한 배음 인상적
2악장이 시작되자 그리모는 그간 내내 굽혔던 몸을 가끔씩 꼿꼿하게 펴곤 했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보는 듯한 연주가 전개됐다. 낭만적이면서도 순수한 동심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느릴 때도 너무 느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만 느렸다. 격정으로 치닫다가 평온해지곤 했는데, 이때 왼손과 오른손의 미묘한 어긋남이 귀에 들어왔다. 이는 음악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소극적인 터치로 시작된 3악장에서는 약간 뭉개지는 부분도 나왔는데, 발을 구르듯 적극적인 페달링으로 전환을 모색했다.

두 번째 곡은 알반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 Op.1이었다. 베르크의 초기작이지만 현대곡이어서인지 그리모는 악보를 보며 연주했다. 속이 들여다보일 듯 투명한 타건과 그것을 둘러싼 풍성한 배음이 인상적이었다. 12음기법의 작품치고는 생경함이 덜했고 마치 리스트의 작품처럼 다가왔다.

그리모는 사전에 여러 대의 테스트를 거쳐 2대의 피아노를 선택했다. 그리고 인터미션 때 다른 피아노로 교체했다.

2부 첫 곡은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였다. 여운이 남는 첫 음에 이어 사나운 다이내믹이 펼쳐졌다. 빠른 템포를 견지했는데, 때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별을 흩뿌리는 듯한 고음부의 연주 뒤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초적인 힘과 서커스적인 기교 대신, 아름다운 고장들을 두루 돌아보는 여행을 묘사한 기행문적인 서사성이 전면에 드러났다.

마지막 곡인 ‘루마니아 민속무곡’에서 그리모는 이전보다 몸을 많이 움직이며 연주에 임했다. 이제 몸이 풀린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남은 힘을 던지는 자유로운 해석이었다. 고삐 풀린 말처럼 템포가 빨라지기도 했다.

그리모는 쇼팽 3개의 새로운 연습곡 중 1번 F단조,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Op.33-9, 조반니 스감바티가 편곡한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중 ‘정령의 춤’ 등 3곡의 앙코르를 선사했다.

콘서트홀에 불이 들어온 뒤에도 풍성한 잔향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피아노 한 대가 청중들과 이룬 공명이 협주곡 못지않게 음악당을 가득 채웠다. 연주 프로그램 간의 연관성도 어느 정도 집중력을 부여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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