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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급소는 단 한 군데 정확히 찌르면 희로애락이 죄다 나온다”

지난달 30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나에게 불의 전차를’의 출연배우들. 왼쪽부터 차승원, 히로스에 료코, 구사나기 쓰요시, 가가와 데루유키.
‘일본의 송강호’라고 설명하면 될까. 명배우 가가와 데루유키(48·香川照之)가 한국에 왔다. 2008년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한·일 연극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재일교포 연출가 정의신의 최신작 ‘나에게 불의 전차를’에 출연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전회매진을 기록한 화제작으로, 2월 3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주연 잡아먹는 조연’ 가가와 데루유키를 만나다

일본 대중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가가와는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인물. 일본에서 그는 ‘주연 잡아먹는 조연’으로 통한다. 60억 엔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된 영화 ‘20세기 소년’을 비롯한 수많은 화제의 영화와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며 소름 돋는 리얼리즘으로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2008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단편 ‘흔들리는 도쿄’에서의 인상적인 연기로 한국팬들에게도 주목받았다.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의 공연 장면들.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도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남사당패를 소재로 불행한 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개개인의 삶을 비추면서 수원 제암리 사건 등 민감한 역사문제를 건드린 문제작이다. 배우 차승원의 외줄타기와 일본의 국민 아이돌 SMAP의 구사나기 쓰요시가 출연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이 ‘정의신표 블록버스터’에서도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것은 가가와 데루유키다. 그가 연기하는 기요히코는 독립운동을 음지에서 지원하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한국과 일본의 틈새에서 살아온 정의신 연출 자신이 투영된 뜨거운 역할이다. 땀과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혼신의 힘을 다 쏟는 그의 무대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살아 있는’ 연기였다. 국립극장에서 1월 29일 그를 만났다.

-정의신 연극에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15년 전 정의신이 각본을 쓴 영화 서너 편에 출연했던 인연으로 그의 재능을 잘 알고 있다. 연극인으로서 어떤 연출을 할 것인지 기대가 되어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의 생각과 말하고 싶은 바를 잘 알고 있고, 그도 나만의 방식을 알고 있기에 작은 부분까지 의논하지 않아도 서로 통한다. 내가 존경하고 나를 존중해 주는 연출가다.”

-한국인의 피를 숨긴 채 독립운동을 몰래 돕는 역할에 몰입이 잘 되나.
“나는 우리 모두가 서쪽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중국 너머에서부터 조선으로, 다시 일본으로 온 것이라는 의식, 즉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 한국인의 조상은 중국인이라는 감각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전쟁 중이니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겪는 갈등과 이중성은 잘 이해가 된다. 당시 이런 사람이 많이 있었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살기 위해 한국인임을, 일본인임을 이용하는 건 매우 인간적이고 대부분 그렇게 산다. 인간이 신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존엄을 지키는 일은 거의 없다. 살면서 단 몇 차례 죽음을 무릅쓰고 자아를 지킬 뿐, 그 밖의 몇 십 년은 계속 비겁하게 산다. 그 몇 번의 찬스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라 생각하고, 기요히코는 마지막에 그 한순간을 보여주는 역할이다.”

-한·일 관계가 민감한 시점에 양국 간 역사문제를 다룬 문제작이다.
“역사문제란 크게 보면 어렵지만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과거 일본의 행동을 물론 잊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서로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정답은 아닐 거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좋은 감정을 갖고 그것이 보편화된다면 문제는 끝날 텐데 멀리서 견제만 하니 끝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이 만나 마음을 통하는 것이 정치문제를 풀어가는 일이고, 전진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소름 돋는 리얼리즘으로 존재감 과시
-정의신 연극은 눈물과 웃음이 하나 되는 독특한 스타일인데 일본에선 이런 것이 익숙한가.

“일본에도 없다. 일본인은 눈물과 웃음이 직선의 극과 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연기를 하면서 그렇지 않은 감각도 있음을 알게 됐다. 눈물과 웃음은 하나의 리본이 꼬였다가 끝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생각인데, 정의신 역시 눈물과 웃음을 하나로 이어 눈물에서 웃음으로, 웃음에서 눈물로 바로 점프한다. 연극적으로도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급소를 정확히 찌르는 방식이다. 인간의 급소는 한 군데뿐이라 정확히 찌르면 거기서 희로애락이 다 나온다. 괴로움을 잘 아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정의신다운 방식이다.”

가가와는 1998년 정의신 각본, 최양일 감독의 영화 ‘개, 달리다’로 주목받기 시작해 한국인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그는 ‘자이니찌’(재일한국인을 비하해 부르는 말)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일본이 우월하다는 뒤떨어진 생각을 하던 시대가 있었던 만큼 한국인이 괴로움을 당했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이 만드는 작품은 역시 좋은 작품이다. 얼마나 괴로워했느냐가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어려움 없이 살아온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이번 작품에 함께 한 차승원에 대해서도 “공연 초반에는 줄타기에 실수할 때도 많았지만 그 실수가 더 감동적이었고, 그가 많이 실수할 때의 무대가 훨씬 좋았다”며 “그때 우리가 많이 울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하는 모습에 그가 지금까지 밟아온 힘든 길과 지금 스타로서 빛나고 있는 전부가 담겨 있어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됐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을 동경해 ‘흔들리는 도쿄’에 캐스팅되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봉준호에겐 작은 것과 큰 것을 원 컷에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예컨대 ‘흔들리는 도쿄’는 내가 변기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시작되는데, 변기에 앉아 있는 행위란 얼마나 사소한가. 하지만 그 컷을 다루는 방식은 마치 눈앞에 아주 위대한 뭔가가 펼쳐지듯 커다란 느낌이다. ‘살인의 추억’도 소년이 메뚜기를 잡다가 하수구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곤충의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하지만 그 작은 부분에 열쇠가 감춰져 있고, 이윽고 큰 흐름이 되어 라스트 컷의 같은 장소로 이어지는 것이 전부 계산된 것이다. 작은 곤충과 사람의 죽음이라는, 매우 큼과 작음을 대비시키는 방식인데, 봉준호의 작품은 항상 이런 대립이 꽉 차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정의신의 웃음과 눈물이 함께 있는 것과 비슷하다.”

2006년 오다기리 조 주연의 영화 ‘유레루’에 주연급 조연으로 나와 각종 영화제의 주연상과 조연상을 두루 휩쓸며 ‘주연보다 인상적인 조연’으로 각인된 그는 중국영화 ‘귀신이 온다’(2000) 출연을 계기로 진짜 연기에 눈을 뜨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중국에서는 일본처럼 배우를 배려하거나 신경 쓰지 않으니 배우가 참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편이 낫다. 정말 화가 나고, 진짜 감정이 생기니까. 사람들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를 보고 싶어한다. 배우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참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의 대전환을 경험했다.”

그는 ‘연기란 연기하지 않는 것. 따뜻한 마음만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연기론을 펼쳤다. ‘따뜻한 마음’이란 “스태프 전원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오늘은 좋은 하루였다고 느끼도록 신경 쓰는 것”이란다. “스태프는 배우만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좋은 느낌을 줄지 나쁜 느낌을 줄지 열쇠를 쥔 셈이다. 내 멋대로 굴면 모두가 기분이 나쁘고, 내가 참고 행복한 얼굴을 하면 모두가 즐겁다. 모두가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봐주니 내가 힘을 받고, 결국 연기로 전달된다. 자기 대사만 외우는 배우와 더 큰 배우의 차이는 거기서 나온다.”

지난해 47세로 가부키 배우 늦깎이 입문
가가와는 최근 특이한 이력을 더했다. 지난해 47세의 나이에 뒤늦게 가부키 배우로 입문한 것. 수퍼 가부키의 창시자인 이치가와 엔오(市川猿翁)의 아들이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가부키 배우로 성장할 수 없었던 그가 뒤늦게 전통예능가문의 후계자로서 대를 잇고자 나선 것이다. 지난해 6월 도쿄에서 9세 아들과 함께 데뷔 무대를 치렀고, 올 들어 오사카 쇼치쿠좌에서 지난달 26일까지 ‘壽初春大歌舞伎’ 무대를 밟았다.

-보통 가부키 배우는 3세 때부터 훈련을 받는다던데.
“이번 작품에서 한국어 대사를 통째로 외우듯 훈련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응용을 하지만 나는 하나의 작품을 통째로 입력해야 한다. 보통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안 좋은 방법이지만 별 수 없다. 마치 여자가 억지로 군대를 간 듯한 느낌이고, 주변에서도 왜 여자가 군대에 들어왔느냐는 시선이지만, 고행을 견디는 자세로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미 최고의 배우인데 굳이 가부키를 계승하려는 이유는.
“아버지가 가부키 배우니 어쩔 수 없다.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무언가를 발견한 거다. 대대로 이어온 가부키 전통을 내가 끊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동안 하지 못한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고, 이제라도 다음 세대로 이어간다면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현재로선 희생해야 하는 부분도 많지만 가장 힘든 지점으로 공을 던져 성장하기를 택한 거다.”

-가부키는 전통예능인데 지금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다. 일본인에게 가부키의 매력은 뭔가.
“나라마다 듣기 좋은 특유의 호흡이 있고, 일본인 특유의 호흡은 전부 가부키에 들어 있다. 그 호흡으로 말하면 눈물도 웃음도 터져 나온다는 것을 가부키를 하면서 알게 됐다. 같은 대사도 어제는 웃음이 터졌지만 오늘은 안 터질 때가 있다. 호흡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가부키의 호흡은 정해져 있고, 일본인에게 가장 듣기 좋은 소리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현대극도 잘 써진 각본은 그런 호흡이 잘 돼 있는 것이고 잘못 쓴 건 그 반대다. 정의신 작품도 그런 호흡이 살아 있기에 매력적이다.”



가가와 데루유키(香川照之)
도쿄대 문학부 졸업. 가부키 배우 이치가와 엔오와 다카라즈카 가극 톱스타 출신의 여배우 하마 유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가부키 가문과 연을 끊었지만 1989년 연기자로 데뷔해 영화, TV, 연극을 넘나들며 확고한 자기세계를 구축했다. 2006년 영화 ‘유레루’로 요코하마영화제 남우주연상, 2010년 NHK대하드라마 ‘료마전’으로 일본 드라마 아카데미에서 만장일치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을 비롯, 일본 아카데미상과 영화평론가대상 등 수많은 연기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자 최근 개봉한 영화 ‘바람의 검심’에도 출연했다. 2012년 가부키에 입문해 수퍼가부키 ‘야마토다케루’로 첫 무대를 밟아 화제가 됐다. 가부키 배우로는 ‘이치가와 추사(市川中車)’라는 예명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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