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시가 있는 아침] 밤

밤 - 진은영(1970~ )


술자리의 음란한 말들이 자꾸 흘러가네

밤은 고양이의 울음으로 짠 검은 망사 속옷을 입었네

얼빠진 도둑이 살찐 빈 보석함을 훔쳤다네

녹색 씀바귀의 불빛에 술꾼들은 혀를 담그네

달은 혼자 빠져나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텅 빈 광장의 축축한 구석들에 누워보네


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건강한 낮을 잉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이기도 한 시인이 보는 밤은 너무 어둡고 침울해서 달이 홀로 밝히기엔 벅차 보인다. 여기저기 벌어지는 술자리는 음란한 말들이 자꾸 흘러간다. 크고 비싼 자리일수록 더 음란하고 더 은밀한 말들이 오고 갈 것이다. 얼빠진 도둑들은 본질이 아닌 겉만 번지르르해 보이는 살찐 빈 보석함을 훔치며 활개치고 술꾼들은 녹색 씀바귀의 불빛에 마비된 혀를 담근다. 고양이의 울음으로 짠 검은 망사 속옷을 입은 것 같은 이 음울한 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빠져나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텅 빈 광장의 축축한 구석에 누워 웅크린 달이 쓸쓸히 지새우는 밤. 누군가 우리의 밤을, 우리의 노래를 훔쳐 가는 이러한 밤이 과거가 아닌 현재라면 아니 앞으로도 좀체 변하지 않을 풍경이라면 그 밤이 낳을 이튿날 아침과 낮의 모습은 절망의 다른 이름일 텐데. 이 시가 범상치 않게 중의적으로 읽히는 것은 왜일까.

(곽효환·시인·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 [시가 있는 아침] 더 보기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