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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국 통일’ 유혹 내치고 번영 일군 현실론자

1963년 아데나워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서베를린을 방문해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케네디는 당시 “나는 베를린 시민(Ich bin Berliner)”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위키피디아]
“동·서독 전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독일의 재통일을 제안한다. 그 조건으로 독일은 중립국가, 외국 군대의 완전 철수와 평화조약, 그리고 유엔 가입을 요구한다.”

한국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던 1952년 3월 10일. 스탈린은 센세이셔널한 각서로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탈린 각서’다. 패전국 독일은 1949년 분단 후 서독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동독엔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시스템이 들어섰다. 서독 초대 총리로 선출된 아데나워는 친서방 정책을 주요 노선으로 삼았다. 당시 아데나워는 미영프 등 서방과의 유럽방위조약 서명을 앞두고 있었다. 스탈린은 독일을 포함하는 서유럽 경제군사공동체의 출범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스탈린의 ‘중립국 독일’ 제안이 서독과 서방 간의 이간질을 목표로 했는지, 아니면 독일통일의 기회를 주려 했는지는 아직도 학계에선 논란거리다.

아데나워의 자세는 확고했다. 그는 이 제안에 대해 “독일 전 지역을 진공상태로 만든 다음에 지리적인 인접성과 권력 수단을 통해 소련은 독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잿더미가 된 독일을 위해선 서방세계로의 편입이 ‘중립국 통일’보다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힘을 길러 천천히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대해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 총재와 보수신문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독일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다. 아데나워가 총재인 기민당(CDU)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다. 외견상 ‘스탈린 각서’는 독일 흔들기에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은 국민 지지를 받았다. 1953년 연방선거에서 기민당이 사민당을 이긴 것이다. 국민들은 스탈린의 정치 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아데나워를 믿었다. 당시 독일은 점령국 조례의 적용을 받고 있었다. 독일의 ‘행동 반경’이 넓지 않고, 미국 등 서방이 스탈린 각서를 수용할 리 만무했다. 아데나워는 현실주의자였다. 한국전쟁으로 냉전 구도가 심화되자 독일이 제3의 길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스탈린의 야욕이 지구 반대편인 한반도에서 전쟁으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스탈린 사후 후르쇼프가 권력을 잡자 아데나워는 55년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를 단행했다. 파격적인 정치·외교 행보였다. 또 소련에 감금된 전쟁 포로 1만 명을 데려왔다. 아데나워 정치인생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이었다. 아데나워는 59년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언젠가 소련은 독일 분단과 이에 따른 유럽의 분단이 자신에게 이득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언제 그 순간이 올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가까워지거나 다가온 것처럼 보이면 우리는 이 순간을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29살이던 미래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이 이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콜은 아데나워의 ‘정치 손자’답게 89년 통일의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스탈린 각서에 대한 아데나워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스탈린 사후 소련과 수교 - 포로 1만 명 귀환
미·소 냉전의 최대 화약고는 콘크리트 장벽으로 상징되는 베를린과 동·서독의 분단지역이었다. 양측의 군사적 충돌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는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진다면 독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은 지구의 반대편인 한반도에서 터졌다. 한국전쟁으로 독일만큼 수혜를 입은 나라도 별로 없다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외교안보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아데나워에게 확실하게 친서방 정책을 추진할 동력을 제공했다. 또 독일은 전쟁 특수를 누리게 된다. 독일의 경제부 장관이자 2대 총리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자서전 『모두를 위한 번영』에서 “독일 경제 발전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 한국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전 세계적으로 군수물자 수요가 급증했을뿐 더러 미·영 등 서방 국가는 패전국 독일에 대한 경제 제재를 거의 다 해제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독일의 수출은 두 배 이상 늘었고, 실업률은 대폭 낮아졌다. 연평균 성장률이 10% 이상으로 뜀박질했다. 52년부터 라인 강의 기적이 본격화한 것이다.

독일 현대사를 잘 응축하는 표현으로 ‘레드 카펫’만 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서방 지도자들과 동등하게 레드 카펫을 밟았고, 독일의 경제 발전은 서방의 레드 카펫을 함께 밟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치즘의 탄압과 고초를 이겨내면서 강인한 정치인으로 성장한 아데나워의 현실 분석과 시국관은 정확하고 예리했다.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권모술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패망한 독일 국민의 국권 회복과 자존심을 지켜가는 마지막 보루였다. 서독의 발전은 서방 강대국의 ‘카펫’에 함께 올라타야 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49년 첫 연방선거의 슬로건으로 ‘모두를 위한 번영’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사회적 시장경제와 서방과의 연대를 주창했다. 그가 이끄는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승리하자 아데나워는 첫 총리에 취임했다. 그에겐 레드 카펫과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49년 9월 21일, 본 근처의 페터스베르크에서 점령군 수뇌들에게 독일 초대 정부의 출범을 신고하는 자리였다. 미영프 전승국 3개국의 고등판무관들은 카펫 위에 서고, 아데나워와 정부 각료들은 카펫 밖 끄트머리에서 신고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 센 아데나워는 두 발을 카펫 안 끄트머리에 딛고 신고식을 치렀다. 전승국들과 독일이 동등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일제히 이 사진을 게재했고, 독일인의 자존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의미의 레드 카펫은 모두를 위한 번영을 내건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을 두고 한 말이다. 아데나워는 전쟁의 폐허에서 민생고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는 경제에 관해선 비전문가였다. 다행히도 그는 최고의 경제전문가를 만난다. 초대 경제부 장관인 에르하르트(훗날 2대 총리)다. 그는 소련의 계획경제도 아니고, 미국의 자유경제와도 다른 ‘사회적(Sozial)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선 시장의 효율과 능률을 높이고,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국가 개입과 사회보장제도를 추진했다. 아데나워가 정치·외교의 총리라면 에르하르트는 ‘경제 총리’였다.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든 두 바퀴였다. 그 덕에 고도성장, 완전고용, 사회복지를 실현하면서 서독은 국가 재건에 성공했다.

말년에 언론 탄압 ‘슈피겔 사건’으로 오명
집권 후반기에 아데나워는 실수가 잦았다. 흐루쇼프가 서독과 연합군에 ‘서베를린을 포기하라’는 통첩을 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어 61년 동베를린 장벽이 건설될 때도 그는 임시 수도 본(Bonn)에서 무능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는 당시 장벽 앞에서 부당함을 호소해 새 지도자로 부각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면서 아데나워의 정치인생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 안팎에선 퇴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주치의가 ‘2년만 할 수 있다’고 말하던 총리직을 10년 넘게 맡을 무렵이었다. 총리 말년에 보인 그의 권력욕 때문에 ‘노욕의 정치인’이란 비난을 들어야 했다. 잇따라 정치 스캔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신호탄은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슈피겔(Spiegel) 사건’이었다. 서독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방위계획에 관한 기사를 쓴 기자와 편집장에게 국가반역죄 혐의를 뒤집어 씌어 구속한 것이다. 시민들은 시위로 분노를 표출했고, 스트라우스 국방장관이 물러나야 했다. 이어 아데나워도 ‘2년 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비록 건국의 아버지라도 민주주의 원칙과 권력의 한계를 넘어서면 몰락한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그는 또 총리직 후계자로 에르하르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가 반대한 ‘뚱보’ 에르하르트를 당원들이 총리로 추대했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아데나워를 ‘풀뿌리 민주주의’가 이긴 것이다. 서독 땅에는 서서히 새로운 문화혁명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권위보다는 해방, 긴장보다는 데탕트, 재무장보다는 반전(反戰) 등 새로운 문화현상이다. 아데나워 시대가 끝나감을 알리는 소리였다.

21세기 들어 아데나워는 재평가되고 있다. 2003년 공영방송 ZDF가 실시한 ‘위대한 독일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종교개혁 선구자인 마르틴 루터를 제치고 아데나워가 1위를 차지했다. 3위는 동방정책의 빌리 브란트 총리였다. 아데나워가 자유민주주의와 국가번영의 초석을 쌓은 공로를 평가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 14년은 21번이나 구성된 바이마르공화국의 내각보다도, ‘천년 제국’이라던 히틀러의 제3제국보다 길었다. 아데나워는 앙숙이었던 프랑스와의 화해를 위해 26번이나 파리를 방문해 53년 ‘엘리제 조약’을 성사시켰다. 대학살의 참사를 당한 유대인에 대한 배상도 시작했다. 유럽공동체(EC)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 정치인의 제1 덕목을 꼽으라는 질문에 아데나워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라고 답변했다. 패망한 조국을 건설하고, 점령국으로부터 주권을 되찾고, 소련과 동구권을 극복하기 위해선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싣는 순서
1 콘라트 아데나워(기민당)
건국의 아버지, 현실주의 리더십
2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기민당)
낙관주의 리더십, 라인 강 기적의 주역
3 게오르크 키징거(기민당)
중재 리더십, 대연정 실현
4 빌리 브란트(사민당)
비전 리더십, 동방정책
5 헬무트 슈미트(사민당)
마도로스(선장) 리더십, 복지국가 정비
6 헬무트 콜(기민당)
동물적 본능의 리더십, 동서독 통일
7 게르하르트 슈뢰더(사민당)
스마트 리더십, 사회·경제 개혁
8 앙겔라 메르켈(기민당)
뚝심·기다림의 리더십, 유럽 중심 국가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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