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응답하라 2003

그것은 휴대전화의 진동 같았다. 그렇게 몇 번을 속고 요즘도 가끔 속으면서 남자는 눈을 뜬다.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기를 확인한다. 아침 6시30분. 역시 전화나 문자가 온 것은 아니다. “우웅우웅.” 그 진동과 소리는 누군가 남자를 찾는 신호 같았다. 아내가 돌아누우면서 중얼거린다. “위층에서 세탁기 돌리나 보네.”

남자는 베란다로 나간다. 하얀 가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부지런한 아내가 쓸고 또 쓸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하얗게 가루가 쌓였다. 천장의 페인트 칠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하얀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아내가 아끼는 화초들인 아테누아타와 콤펙타와 콩고와 자바나무 위에도 가루는 하얗게 쌓였다. 칠이 벗겨진 천장에는 얼룩이 져 있었다. “물이 새는 거야.” 화분을 거실로 옮기며 아내가 말했다.

남자는 위층을 의심했다. 일단 관리사무소에 연락했다. 관리사무소에서 나온 전문가는 천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남자의 의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위층에서 물이 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남자가 묻자 전문가는 난처한 얼굴을 한다. “위층 베란다를 살펴봐야죠. 그런데…” “그런데 왜요? 무슨 다른 문제가 있나요?”

문제는 2003호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전 남자가 이사 오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2003호는 사생활 보호를 이야기하며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장이 이렇게 된 것은 이사 오기 전부터 그랬던 건데 페인트 칠을 새로 해서 한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자는 2003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생활이 위층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래층에도 있는 것인데 그걸 이유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게 도무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자는 화가 났다. 전문가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2003호의 벨을 눌렀다. 남자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다.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아래층의 사정을 설명하고 부득이 2003호의 베란다를 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의 진단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감정이 복받쳐서 말이 약간 거칠어졌다.

2003호는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인터폰으로 말했다. 1903호 천장에서 물이 샌다고 그게 꼭 자기집 때문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였다. 오래된 아파트라 외벽에서 물이 들어올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남자는 전문가를 바라봤다. 전문가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위층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외벽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자 2003호는 거 보라며 코웃음을 쳤다. 먼저 외벽부터 조사해 보라는 것이다. 남자는 정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서라도 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를 높였다. 2003호는 자기집 때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절대 문을 열어줄 수 없다며 돌아가지 않고 집 앞에서 계속 소란을 피우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결국 남자는 돌아서야 했다. 마치 변심한 애인의 집 앞에서 돌아서는 남자처럼. 요즘 남자는 아침 6시에 눈을 뜬다. 어쩐 일인지 위층 세탁기 돌리는 시간이 30분 더 빨라졌다. 여전히 아내는 날마다 베란다를 청소한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혹시 2003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노려본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