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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이 있어 편안한 곳, 머리 복잡하면 저절로 발길

서울 통인시장에서 서지희 ㈜더손 대표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은 반찬가게다. “다 맛있더라”며 뭘 고를지 매번 망설인다. 이날 서 대표의 눈에 들어온 음식은 5000원짜리 빈대떡이다.


“목적을 갖지 않고 들르는 곳이에요. 번잡스럽고 바쁜 세상에서 한발 비켜 있는 곳이지요. 여유가 있고, 감성이 있고, 이야기가 있어요.”

나의 놀이터② 브랜드 컨설턴트 서지희의 ‘통인시장’



  브랜드 컨설팅업체 ㈜더손 서지희(50) 대표는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을 자신의 놀이터로 꼽았다. 2011년 사무실을 인근 궁정동에 차리면서 알게 된 재래시장이다.



  “떡집, 생선가게, 김구이집, 참기름집, 떡볶이집 등이 좁은 골목형 시장통에 자리잡고 수십 년 넘게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어 온 곳입니다. 여기 가게 주인들은 자기가 파는 상품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라고 자부하죠. 신기한 정보, 재미난 얘기에 끌려 머리 식히고 싶을 때면 통인시장으로 저절로 발길이 옮겨져요.”



40년 된 생선가게에서 코다리를 사고 있는 서지희 대표.
  사실 서 대표의 이력을 따져보면 재래시장과는 거리가 멀다. 서 대표는 1987년 대학(성신여대 의류직물학과) 졸업 뒤 곧바로 결혼해 전업주부로 살았다. 식도락가인 시아버지의 권유로 호텔 주방장 등에게 요리를 배우며 재미를 느낀 서 대표는 92년 프랑스 파리의 ‘마리 블랑슈’ ‘르코르동 블루’에서 본격적인 요리 공부를 했다. 또 아이들 공부 때문에 6년간 머무른 영국 런던에선 ‘제인패커 플라워스쿨’에 다니며 꽃꽂이를 배웠다. 귀국해 ‘파티앤코’라는 파티 기획 회사를 만들었고, 2007~2010년에는 라이프스타일 교육기관인 ‘까사스쿨’ 총괄 디렉터를 맡았다. 그 사이 루이뷔통·스와로브스키·마크제이콥스·티파니 등 해외 유명 브랜드의 파티 행사를 맡아 치렀다. 파주 헤이리와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 삼성동의 유명 레스토랑 론칭과 리뉴얼 작업을 컨설팅했다. 유럽에서 익힌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가 그의 강점이었다. 그랬던 그가 서울 강북의 오래된 재래시장에 꽂힐 줄이야.



  “시장에 가면 점포마다 분위기가 다 달라요. 획일적으로 꾸며놓은 백화점이나 마트에선 보지 못한 풍경이죠. ‘도영이네 생선집’ ‘곽가네 음식’ 등 이름도 정겹지 않나요.”



  그동안 주로 청담동·압구정동 일대에서 일해 온 서 대표는 “궁정동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편안해졌다고 한다. 서 대표는 “옛날 동네의 느리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사람을 여유 있게 만드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소유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도 그에겐 큰 변화다. “예전엔 좋은 물건을 보면 꼭 집에 가져오고 싶었는데, 이젠 그냥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고 했다.



  “전엔 가질 수 없는 건 사진이라도 찍어두자는 생각에 한 번 출장을 가서 1000장 넘게 사진을 찍곤 했어요. 하지만 이젠 ‘이 순간을 즐기자’며 사진도 안 찍어요. 눈에 담아 기억에 남기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서요.”



  물건을 사겠다는 욕심을 버린 그에게 통인시장은 무수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여섯 자리 전화번호가 아직 적혀 있는 오래된 간판과 갖가지 곡식을 담아둔 짚풀 바구니 등은 공간 연출을 컨설팅하는 서 대표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서 대표를 끄는 통인시장의 매력 중엔 음식 맛도 큰 몫을 차지한다. 특히 제철 식재료로 맛을 낸 반찬가게 앞을 그냥 못 지나친다.



 “직접 기름 발라 구운 파래김, 정말 오랜만에 먹어봤어요. 굴무침·시래기나물볶음·빈대떡도 진짜 맛있고요.”



 가끔 시장 안에 있는 ‘도시락 카페’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곳에서 500원 단위 엽전을 구입하면 빈 도시락통을 주는데, 이 엽전으로 시장 내 가게들을 돌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엽전은 쿠폰이고 먹는 음식은 시장통 뷔페식인 셈이다.



(왼쪽) 식료품 가게 앞. 오래된 조미료·과자 봉지를 하트 모양으로 잘라 장식한 모습이 정겹다. (오른쪽) 참기름집에서 깨소금을 갈 때 사용하는 무쇠 절구.


지난 17일 오후 통인시장에 ‘놀러’가는 서 대표를 따라갔다. 잠깐 둘러본 시장에서 신기한 물건을 여럿 만났다. 참기름집 앞 무쇠 절구는 깨소금 빻을 때 쓰고(기계로 빻는 것보다 왠지 맛이 좋단다), 생선가게 나무 막대기는 살아 있는 광어를 기절시킬 때 쓴다. “어머, 이게 뭐에요?” 서 대표가 물을 때마다 가게 주인들이 알려준 용도다. 단골도 아니라는 서 대표에게 “이것 먹어보라”며 맛보기를 권하는 상인들도 꽤 많았다. 서 대표가 “통인시장은 처음부터 낯설지가 않고 마치 내가 오랫동안 산 곳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고 말할 만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서 대표의 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달랑거렸다. 찬거리로 산 코다리 1코(4마리)가 들어 있다.



 “내장 제거한 부분이 반짝반짝거려요. 싱싱하다는 증거지요.”



 이 역시 40년 역사의 생선가게 주인에게 배운 지식이다. 남는 게 많은 나들이였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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