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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다시 만난 앤, 시간이 바꿔놓은 나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어릴 적엔 ‘빨간머리 앤’의 주인공 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수다스럽고 매사에 ‘오버’하는 앤이 왠지 밉살스러워 주제곡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를 “사랑스럽지도 않아”로 바꿔 부르는 퉁명스러움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1986년 KBS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빨간머리 앤’ 50부작을 열심히 챙겨봤던 건, 앤이 살던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이 끌려서였다. 당시엔 배경이 캐나다란 사실도 몰랐으면서, 어른이 되면 저 동네에 꼭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으니까.



 원작은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그린게이블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앤은 79년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속의 양 갈래머리 소녀다. 지난 9일 한국에서 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이 TV 시리즈의 1~4회 분량을 압축해 보여주는 게 전부다. 고아원에 살던 열한 살 소녀 앤이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가 살고 있는 그린게이블에 찾아와 정착하게 되는 내용까지다. 모든 게 기억 속 그대로지만 고(故) 정경애 성우가 연기한 앤의 독특한 하이톤 목소리와 ‘주근깨 빼빼 마른~’으로 시작하는 한국판 주제곡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극장을 나서는 여성 관객들도 비슷한 감상이다. “근데, 주제곡은 한국 게 훨씬 좋은 거 같아.”



극장판 애니 ‘빨간머리 앤 :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
 27년 만에 다시 만난 앤은, 초등학교 때 만난 또래 친구 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쟤 왜 저러는 걸까요” 하며 봤던 앤의 과장된 감정표현과 허무맹랑한 상상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잃고 여러 집을 전전하며 구박덩이로 살아야 했던 소녀 앤. 끊임없는 수다와 공상만이 희망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탈출구였다는 걸 이제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됐달까. “너의 진짜 사연을 얘기해 보라”는 마릴라 아주머니의 말에 “진짜 이야기는 재미없어요”라고 거부하는 앤의 모습에선 자꾸 코끝이 시큰거렸다.



 추억 속의 작품을 다시 만나는 재미란 이런 게 아닐까. 뻔히 아는 이야기에서 과거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감동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험을 통해 시간이 바꿔놓은 나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 초등학교 땐 뜻 모르고 흥얼댔던 구창모의 노래 ‘희나리’가 사실은 병적인 집착에 휩싸인 한 남자의 울부짖음이란 걸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듯, 앤보다 마릴라 아주머니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빨간머리 소녀 앤이 왜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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