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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개천에서 용 나기

이영직
변호사
때로는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라도 그중에 부적절한 용어가 들어 있어 본래의 취지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빌미를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지금은 작고한 여류 작가가 20여 년 전에 쓴, 한 시인의 시구에서 빌려온 『나는 왜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작가는 사회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사소한 일상사에 매몰되는 자신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아니 내용을 보면 작가의 진심이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목만 본다면 그러한 자신을 합리화하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음 직도 하다. 그리하여 그 당시 나는 농 반 진 반으로 “나는 지금까지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였는데 이러한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분개하고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겠다”로 제목을 바꾸어야 한다고 지껄였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도 나는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명제 중에 비틀고 싶은 것이 있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안 나는 세상’ 운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부의 대물림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교육마저도 계층을 고착화하는 합법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하는 한탄이다. 부모의 학력 수준, 소득 수준, 심지어는 아파트의 평수와 가격, 지역에 따라 대학 진학률(아니 90%에 이르므로 대학 진학률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이 아닌 ‘명문대’ 진학률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도 많이 있다.

 나 역시 이러한 한탄에 동조한다. 실증적인 자료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생활을 하면서 직감한다. 내가 생활하고 있는 지역은 도시가 크게 양분화되어 있다. 이른바 신도시라고 하는 아파트촌과 ‘잡다한’ 개인주택, 상가주택, 상가 위주로 이루어진 구도시로 구분된다. 강의나 상담 등 이런저런 사유로 양 지역에 다니는 학생들을 가끔씩 만나게 되는데 학생들의 ‘분위기’와 ‘학구열’, 그리고 차림새에서도 차이가 난다. 물론 ‘명문대’ 진학률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도 개천이니 용이니 하는 말을 뒤틀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기본적으로 개천과 용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데서 오는 것 같다. 그다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위와 같은 용어 자체에 대하여는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장년 세대가 학생 시절을 보낼 때에는 우리 사회에 권력과 부, 명예 등 세속적인 의미에서 선호하는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식민지 통치와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질서와 가치가 사실상 제로 상태로 평균화되어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선호하는 가치를 표상하는 지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누구라도 약간의 ‘능력’만 있다면 선착의 효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을 재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바로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부모 세대의 학력이나 소득 수준 등 자식 세대의 교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덜 ‘세팅’되어 있었으므로 자녀들은 부모들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고 교육을 통하여 ‘신분’의 이동을 활발하게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상황은 바뀌었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배분이 거의 완료됨으로써 새로운 참가자의 폭과 수준이 매우 제한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안 난다는 한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난 소수가 ‘용’이 되면 다수는 ‘지렁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용’과 ‘지렁이’ 그리고 ‘개천’과 그 무엇을 구분한다는 자체가 그 본래적인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데 한 줌을 보태는 것은 아닐까.

 버젓이 펼쳐져 있는 현실에 눈감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거의 ‘세팅’이 완료된, 대다수가 선호한다는 지위가 있다는 것을 과연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여야 할까. 대신 그러한 지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존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는 없을까. 이런 물음에 어떤 실천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이영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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