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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배 아픈 문제부터 풀어라

이정재
논설위원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첫인상은 가끔 모든 걸 결정짓는다. 이걸 실험으로 알려준 이가 사회심리학의 원조 솔로먼 애시다. 예컨대 첫인상 좋은 사람이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대개 ‘아 그 사람, 똑똑하군’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첫인상이 나쁜 사람이라면 ‘아 그 사람, 사기꾼이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식이다. 흔히 첫인상 효과로 불리는 초두(初頭) 효과다. 다음 예를 보자. 애시의 실험에 빗대 만든 문항이다. A와 B, 어느 쪽이 더 진보인가.

 A=성장, 복지, 분배, 반값 등록금, 경제민주화

 B=경제민주화, 반값 등록금, 분배, 복지, 성장

 그렇다. 대부분 B를 고르게 된다. A와 B의 내용은 똑같다. 단지 순서만 뒤집었다. 그런데도 받아들이는 쪽은 A와 B를 구분한다. 애시에 따르면 처음 나오는 단어에 의해 더 강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걸 근혜노믹스에 대입해보자.

 근혜노믹스의 첫인상은 어떤가. 보수의 언어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대표 구호부터 ‘다시 한번 잘 살아보세’ ‘중산층 70%로 끌어올리기’다. 앞의 것은 개발연대 시절 성장제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전형적인 보수의 용어요, 게다가 재탕이다. 뒤의 것은 진보든 보수든 구별 없이 쓰는 중립 언어다. 물론 이런 걸 하지 말자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2% 부족하다. 우선 박근혜표 경제철학이랄 게 없다. 게다가 시대 흐름도 타지 못했다. ‘잘 살아보세’는 배고픈 것 해결을 앞에 놓는 방식이다. 절대빈곤 시대, 요란한 현수막 정치에나 어울릴 슬로건이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며 배고픈 것보다 배 아픈 것 해결에 목말라하는 시대 정신과 따로 논다. 이래서야 대통합도, 야당 지지층 48% 껴안기도 물 건너가기 십상이다.

 지금이라도 순서를 바꿔야 한다. 근혜노믹스의 첫머리에 경제민주화를 갖다 놔야 한다. 그래야 진보의 언어로 말하고 진보의 문법으로 소통이 가능해진다. 지난 대선을 잠시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대선 공약 이슈 1순위는 단연 경제민주화였다. 진보 쪽 여론이 강한 트위터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 조사 결과, 언급 횟수가 2·3위인 비정규직이나 반값 등록금 이슈를 두 배 차이 넘게 따돌릴 정도였다.

 그뿐이랴. 중소기업·소상공인이 가장 아픈 ‘손톱 밑 가시’로 꼽은 것도 ‘경제민주화’였다. 박근혜는 당선 직후 전경련에 앞서 중소기업중앙회를 찾은 첫 대통령 당선인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손톱 밑 가시’를 꼭 뽑아주마 약속했다. 이후 중소기업중앙회가 ‘손톱 밑 가시’ 222건을 수집했더니 경제민주화 관련이 35건으로 가장 많았다.

 순서를 바꾸고 나면 다음은 사람이다. 누가 적임자인가. ‘첫인상 효과’가 확실한 사람, 김종인(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답이다. ‘김종인=경제민주화’로 통한다. 여야를 통틀어 독보적이다. 그를 앞세우는 것은 48%에 대해 경제민주화 인증샷을 찍는 것과 같다. 근혜노믹스에 당장 태클을 걸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라도 잠시 기다려줄 만하다. 보수의 언어로 만들어진 정책이라도 그가 하면 경제민주화로 포장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게다가 70대의 정치 낭객(浪客) 김종인은 거칠고 딱딱하다. 좌충우돌, 새누리당 경제통 이한구와 충돌하고 박근혜와도 각을 세웠다. 궤도를 벗어나면 적절한 때 잘라내면 그만이다. 정치적 세력도 없어 부담이 덜하다. 재벌개혁같이 새누리당에선 누구도 풀기 어려운 숙제를 해치울 적임자란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득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근혜노믹스는 거꾸로 가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출범 이후 공식 브리핑에서 한 번도 경제민주화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 조직 개편에선 경제부총리만 남고 사회(복지)부총리는 실종됐다. 그 경제부총리의 목표도 성장에 초점이 맞춰졌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국내외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부흥을 이끌기 위해 경제부총리를 두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박 당선인 측 관계자는 “언제부턴가 근혜노믹스에서 경제민주화의 순위가 뒤로 밀린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근혜노믹스의 또 다른 근간은 신뢰다. 경제민주화는 근혜노믹스의 주요 공약이다. 이왕 지킬 약속 굳이 뒤에 처박아 둘 이유가 없다. ‘잘 살아보세’는 아버지 대통령 박정희의 몫으로 그냥 남겨두라. 대신 배 아픈 문제 해결에 집중하라. 아버지 박정희는 배고픈 문제를 해결한 대통령, 딸 박근혜는 배 아픈 문제를 해결한 대통령, 이렇게 자리매김하면 좀 보기 좋은가. 두 부녀에게 이보다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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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