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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수 낀 아버지 … 어릴 때부터 손발 되살리는 의사 꿈 키워

아버지는 불구였다. 철도사고로 왼쪽 손을 절단했다. 평생 의수를 끼고 여름에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일곱 살 난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의술이 발달해 손발을 자르지 않고 접합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아들은 자라서 의사가 됐다. 1976년 세계 최초로 절단 허벅지 재접합술에 성공했고, 78년엔 국내 최초로 절단된 엄지손가락 자리에 발가락을 이식했다. 강동경희대병원 의무부총장 유명철(69·사진) 교수 얘기다.



인터뷰 - 아시아 인공관절학회장 ‘뼈박사’ 유명철 교수

 유 교수는 ‘뼈 박사’로 통한다. 지금까지 약 1만5000례의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1년에 약 400~500번 수술을 한 셈이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인공고관절 전치환술을 한 의사다. 이를 인정받아 지난해 11월 아시아 인공관절학회 창립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중국·대만·일본·홍콩 등 12개국이 발의해 개최된 학회다.



 요즘에야 인공고관절 재료나 기술, 디자인 수준이 높아졌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개선돼야 할 것 투성이였다. 수명이 짧고 미세한 가루가 뼈를 녹이는 등 문제가 많았던 것. 유 교수는 “최근엔 인공고관절 수술을 받으면 30년 이상 지속할 수 있고, 피부 절개를 작게 해 조직 손상은 적고, 회복 기간도 빠르다”고 말했다.



  그는 쉴 틈 없이 인공고관절 수술을 했지만 환자 한 명 한 명이 다 기억난다고 했다. 그중 뚜렷하게 각인된 환자가 있다. 20년 전 그를 찾았던 한 청년이다. 휠체어를 탄 그는 양측 고관절이 썩어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겠다는 그에게 인공고관절 수술을 하면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환자는 수술을 받고 3개월 뒤 걸었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뒤 아내와 함께 유 교수를 찾아왔다. 인공고관절 수술을 받은 덕분에 개인택시 운전사가 됐다는 것. 청년은 유 교수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뿌듯한 일이었지만 전국 도처에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유 교수를 병원 밖으로 움직였다. 당시만 해도 의료 혜택을 못 받는 무의촌이 많았다.



 유 교수는 65년부터 무의촌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의대 재학 시절이었다. 당시 의료봉사 활동에 투입되는 의료기기는 청진기·반사경·고무망치가 전부였다. 청진기를 가슴에 대보고 건전지 불빛으로 혀나 입안을 쳐다보고, 고무망치로 무릎과 발목을 쳐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점쟁이가 진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장에서 뼈를 봐야 치료를 하는데 X선 진단장비가 없어 진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다 86년 X선 검진 차량을 특수 제작했다. 국내 최초였다. 당시 금액으로 1억3000만원이 투입됐다.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무료 봉사 진료를 다녔다. 북쪽으로는 휴전선까지, 남쪽으로는 서귀포까지 종횡무진했다. 30년 이상 강동경희대병원 ‘희망사회만들기’ 의료봉사 단장으로 활동하며 8만190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주변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것만으로 힘들 텐데, 고생스럽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유 교수는 “즐겁고 재미있어서 하는 일은 힘들지 않다”고 대답한다.



 무료 진료를 다니다 보면 관절이 상해 고생하는 노인이 많다. 특히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힘줄이 오그라들고 균형 감각이 떨어져 통증을 호소한다. 그렇다고 활동을 줄여선 안 된다. 근육이 약해져 뼈 건강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에 1회, 30분씩 꾸준히 걷기 운동을 권했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에서 집안 청소나 빨래 등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노인이 있는 집에는 소파나 침대·의자 등을 이용하는 게 좋다. 유 교수는 60세 이상에서는 글루코사민·칼슘제·비타민을 복용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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