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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치웠다, 자연이 들어왔다

선재 스님이 ‘제비꽃 집’ 거실에 앉아 눈 쌓인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대자리만 깔린 거실은 한옥의 마루 같은 느낌이다. 거실과 다실(茶室) 사이에는 슬라이딩 도어를 달았다. 장지문으로 방을 나누고 합치는 한옥의 공간형식을 빌려온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기한 집이다. 거실 중앙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시선을 가로 막는 큰 벽이 없다. 산 기슭과 접한 뒤편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모두 통유리로 뚫려 있어 바깥 풍경을 자연스레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

젊은 건축가들과 함께하는 유쾌한 집짓기 ④ ‘제비꽃 집’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큰 길가에서 비포장도로 산길을 10여분 정도 올라가야 닿는 이 곳은 사찰음식 전문가인 선재스님(57)이 운영하는 ‘한국선음식문화 연구원’이다. 거실에 방석을 깔고 앉으니, 마치 자연 속에 돗자리를 편 듯한 느낌이다. 쌀쌀한 겨울 오후인데도 빛이 거실 안으로 따뜻하게 스며든다.



 스님은 어렵게 이곳을 찾아냈다. “제가 음식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가장 청정한 장소가 어디일까 5년을 넘게 찾아 헤맸죠. 양평은 상수원이 있어 법적으로 자연이 보호되는 지역이라, 깨끗한 식재료와 물이 필요한 제게는 안성맞춤의 동네였죠.”



건축가 김개천
 ◆제철 나물의 향기=회색 콘크리트로 마감한 연면적 165(약 50평)의 단층집. 대문을 통과해 현관으로 향하는 계단과 앞마당에는 380여 개의 장독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담근 지 10~20년 된 장들이 맑은 바람과 햇빛의 힘으로 맛있게 익어가는 중이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 자리잡은 집 주변은 스님에게는 식재료 창고다. 봄 여름에는 뒷산에 올라 취나물·엄나무순 등을 딴다. 텃밭에는 불면증과 해독에 좋은 소엽(자소) 등의 약초를 심었다. 특히 4월에는 집 주변을 빙 둘러 흐드러지게 피어난 제비꽃이 장관을 이룬다. “제비꽃을 그대로 따서 다른 약초와 함께 접시에 얹어 살짝 간장을 뿌려 먹으면, 봄이 물씬 느껴지는 건강요리가 되죠.” 이 집의 별명인 ‘제비꽃 집’은 여기서 나왔다.



 ◆공간의 새로운 발견= 집 안에는 소파나 식탁 등 흔한 가구 하나 없다. 불자들과 사찰음식을 배우는 학생들이 자주 찾아오는 만큼 거실 양편으로 참선 공간과 다실 등이 마련돼 있지만, 옆으로 미는 슬라이딩 도어를 열어 놓으면 하나의 큰 공간으로 합쳐진다.



 이 집을 설계한 김개천(55)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는 “계속 변화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경험”에 집중했다. “거실에서 집 뒤편의 창고로 가는데도 주방을 통해 가는 방법,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방법 등 여러 길이 있을 수 있죠. 봄에는 벚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계절이 바뀌면 주변 풍경이 달라지면서 집 안 분위기도 변합니다.”



 거실 복판에는 하늘로 열린 정원이 자리잡았다. 밤에는 별을 볼 수 있다. 내부 벽에는 한지를 바르고, 바닥은 나무와 흰색 타일로 수수하게 마감했다. 단, 중정(中庭) 오른편에 있는 부엌은 고급 소재를 사용해 위생과 편의성을 동시에 고려했다.



앞마당의 장독들. 10~20년 넘게 숙성 중인 장이 담겨 있다. 독 위에 놓인 돌로 장의 종류를 구분한다.
 ◆또 다른 수행처=선재 스님에게 사찰음식 만들기는 평생의 수행이다. 20여 년 전 간경화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으나 사찰음식으로 건강을 되찾게 된 것이 계기였다. 장을 담그고 음식을 만드는 데 쓰이는 이 집 역시 중요한 수행 공간이다.



 “열반경에 보면 상담을 하러 찾아온 이에게 부처님이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라고 물어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일례로 호박 하나에는 햇빛과 물과 바람과 땅의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호박이 수행을 하며 이룬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가 내 생명과 합쳐지는 것이죠.”



 스님은 “요리란 재료가 가진 나쁜 기운을 빼고,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그러자 김 교수가 거들었다. “집도 똑같아요. 땅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주는 게 건축이죠.”



 정작 스님이 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많지 않다. 주중·주말 가리지 않고 서울로, 지방으로 강의를 다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중순에는 미국 뉴욕주 더치스카운티에 있는 바사 칼리지와 맨해튼 조계사 등에서 조리 시연회를 여느라 보름 가까이 머물렀다. 바쁜 일정 때문에 지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양평에 가야 하는 데”라는 말을 한다고 했다.



 “어느 스님이 이 집에 와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서울에서는 30분 이상 앉아있어야 단전에 기가 모이는데, 이 집에서는 5분이면 기가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좋은 집에는 좋은 에너지가 있어요. 한적한 겨울 날, 이 집 거실에 앉아 쌓이는 눈을 보며 명상하는 한 때가 저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김개천=국민대 조형대학 스페이스건축디자인과 교수. 중앙대 건축과 대학원 졸업. 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남 담양 정토사 무량수전, 국제템플스테이센터 등으로 한국건축가협회상·레드 닷 디자인상(Red Dot Design Award)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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