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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춤 춘 첫 발표회 다들 ‘야만인’이라고 했죠

올해 여든인 육완순씨의 사진 촬영은 40여분간 이어졌다. 돌고, 휘감고, 뛰어 오르고…. 현역 무용수에 전혀 뒤지지 않는, 놀라운 체력을 보여주었다. 촬영을 마친 육씨는 “신명난 공연 한 판 뛴 기분”이라며 물을 들이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무가 80명, 출연 무용수 400여 명. 엄청난 규모 아닌가. 그런데 이들이 딱 한 명을 위해 모인다면.

 대한민국 ‘현대 무용의 대모’ 육완순(80)씨가 올해 데뷔 50년을 맞는다. 요즘 50년이 뭐 대수인가. 웬만큼 예술 했고, 또 나이 지긋하면 ‘데뷔 50주년 기념공연’ 플래카드를 달고 축하 무대 갖는 게 다반사다.

 근데 육씨는 스케일이 다르다. 아예 ‘육완순 현대무용 50년’이란 이름을 걸고 페스티벌을 연다. 15일 서울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개막 공연을 갖고, 17일부터 8일간 안무가 80명이 작품을 내놓는다. 육씨의 제자와, 제자의 제자들이 꾸미는 무대다. 육완순이란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는 자리다.

 “선생님이 얼마나 무섭길래 이렇게 다들 모이겠어요”라며 농반 진반 운을 뗐다. 육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원래 한국 현대무용이 50년 되는 해라 이를 기념하려고 했던 건데, 다들 내 이름을 앞에 넣자고 해서…. 돈 많이 들고, 골치도 얼마나 아픈데요.”

 ‘육완순 데뷔=한국 현대무용의 시작’이란 공식은 과장이 아니다. 그가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1963년,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육완순 현대무용 발표회’를 열었는데, 이게 사실상 한국 현대무용의 출정식이었다.

 “그때만 해도 발레와 고전무용만 있었지, 컨템포러리 댄스(contemporary dance)는 개념조차 없었죠. 제가 맨발로 무대 서고, 구르고, 물구나무 서니깐 다들 ‘미친년’ ‘야만인’이라고 했어요.”

 그의 스승은 마샤 그레이엄(1894∼1991)이다. 이사도라 던컨(1877~1927)에 이어 현대무용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기본 원리는 수축과 이완. “제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무대 설 수 있는 건 수축과 이완 덕분입니다. 억지가 없는 거죠. 자연에 순응하는 거, 그게 바로 춤의 본질이에요.”

 육완순의 국내 복귀는 무용 교육의 출발이었다. 그가 64년 이화여대 무용과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이후 타 대학에도 무용과가 하나 둘 생겨났다.

 “무용과가 없어 전 체육과를 졸업했어요. 춤을 별로 익히지 못하고 공 던지고 뛰기만 했죠. 게다가 ‘머리에 든 거 없어’라고 얼마나 무시하든지…. 그때 이 악물었어요. 난 춤도 잘 추지만, 이론도 정립하겠다고.”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이젠 ‘원로’ 소리를 듣고 있다. 대표적인 이가 김복희(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김화숙(국립현대무용단 이사장), 박명숙(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등이다.

 육씨의 대표작은 73년 초연된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통행금지가 끝나자마자 전화 돌렸어요. ‘늦지 마라’고. 출연진 28명이 새벽 5시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연습실에 모여 한 달간 힘들게 만들었어요. 그때 아이 아빠(육씨의 남편은 한국 지질학의 선구자인 이상만(87)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마누라 어디 가출한 거로 쳐 달라’고 했어요.” 이 작품은 지금껏 국내외 300회 이상 공연된, 스테디셀러다.

 그의 인생에도 치명적인 오점이 있다. 91년 이화여대 입시부정 사건이다. 그는 이 일로 옥살이도 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오만하고 자만했던 거죠. 제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좋은 것도 있어요. 교수라는 보호막 없이 허허벌판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겼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춤을 원했나’라고 성찰하게 됐습니다. 어쩌면 그 일에 대한 오욕을 씻고자 지금껏 춤을 추는 게 아닌가 싶어요.”

 육씨는 지금도 하루에 최소 두 시간씩 스트레칭을 한다. 15일 개막 무대에도 직접 선다. 주변에선 “백 살까지 사는 건 당연하고, 아마 그때도 무대에 설 것”이라고 장담한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 내내 그는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지금도 늘 새로운 무대를 꿈 꿔요. 그게 예술가 아니에요.”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그가 선선히 응했다. 다소 부담스런 동작을 요구해도 팔순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부지게 임했다. 다소 자그마한 키, 악바리 같은 근성이 그대로 렌즈에 잡혔다. 그건 영욕의 한국 현대무용 50년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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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