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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혈이지만 한국사람다문화 가정 아이들 롤모델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파워 차세대 <16> 귀화 농구선수 전태풍

“리처드 미들 스쿨 다닐 때 조지아주 챔피언십에서 우리 팀이 우승했어요. 내가 경기 아주 잘했어요. 그래서 이겼어요. 근데 상대팀에 레이시스트(인종차별주의자) 있었어요. 그 팀에 있던 여자애가 나한테 니그로, 친크라고 놀렸어요. 니그로(negro)는 검다는 거고, 친크(chink)는 아시아 사람 아주 경멸하는 말이에요. 너무 화나 ‘퍼 큐 비치(fuck you bitch)’라고 욕했어요. 그 여자 남자친구가 와서 또 싸웠어요. 그래도 그날 이겨서 기분 좋았어요.”



프로농구 고양 오리온스의 포인트가드 전태풍(田颱風ㆍ33)의 한국어 솜씨는 제법이다. 알아듣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말도 꽤 한다. ‘존경을 주지 않았어요’처럼 영어식 표현이나 단어가 종종 흘러나오지만 항상 한국말을 쓰려 노력한다.



그는 혼혈이다. 자신을 “혼혈이에요”라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혼혈이지만 한국사람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라는데 공항에서 내 얼굴 보고 다시 물어봐요. 설명해야 돼요. 난 한국 사람인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미국인이었다. 토니 에이킨스가 옛 이름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2009년 귀화해 전태풍이 됐다. 2009년 프로농구 귀화 혼혈 드래프트 1순위로 KCC에 지명돼 한국 농구판에 발을 디뎠다. 지난해 오리온스로 팀을 옮겼다.

그는 귀화 때 어머니 성을 따라 전(田)씨로 했다. 한국 농구판에 큰 바람을 일으켜 보자는 뜻에서 태풍이란 이름을 택했다. 어머니 친척이 제안한 건데 뜻을 알고 마음에 들어 바로 정했다. 오리온스 추승일 감독은 “팀내 비중이 30~40%에 이르는 중요한 선수”라며 “김치찌개 잘 먹고 농담 잘하는 완전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다. 2012~2013시즌엔 부상 선수가 많아 팀 성적은 부진하지만 전태풍은 최근 팀의 3연승을 이끌며 두 경기 연속 MVP로 뽑히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초등학교 시절 그는 외롭고 힘들었다. 친구가 없었다. 무엇보다 영어를 못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태풍은 한국말밖에 모르는 외할머니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미국 땅에서 살지만 영어보다는 한국말이 더 익숙했다. 부모님은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래도 그 꼬마는 한국말이 더 익숙했다. 말이 잘 안 통하니 또래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왕따를 당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를 ‘오레오(OREO)’라고 놀렸다. 오레오는 하얀 크림이 사이에 들어간 검은색 쿠키다.

“나 미국서 클 때 문제 있었어요. 흑인도 100% 아니고, 한국인도 100% 아니고. 그것 때문에 좀 힘들었어요. 앵거 매니지먼트(anger management?분노 조절) 잘 안 돼 싸움 많이 했어요.”



농구 명문 조지아텍서 4년 내내 주전

그런 그에게 농구는 돌파구였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농구선수 출신인 아버지 주얼 에이킨스(65)는 대학 시절까지 가드로 활동했다. 미 프로농구(NBA)에서 뛰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러 미국에 온 전태풍의 어머니(전명순ㆍ64)를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태풍이 6~7살 때부터 농구를 가르쳤다. 태풍은 농구를 좋아했고 재주도 있었다. 아버지는 농구에 대해선 엄격했다. 잘해도 칭찬을 별로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힘들게 했어요. 헤이트(hate?증오) 하지는 않지만, 그때 아버지가 좀 오버했던 것 같아요. 날 어렵게는 했지만 내게 농구를 알게 해줬어요.”

아버지를 따라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지아주로 이사간 그는 새로 다니는 리처드 미들 스쿨(중학교)에 농구팀이 있다는 걸 알았다. 농구팀을 찾아갔다. “선수로 뛰게 해 달라”고 했다. 감독은 실력을 테스트하지도 않고



“여긴 자리 없다. 여자팀에 자리가 있으니 그리 가라”고 했다. 여자팀에서 일주일을 뛰었다. 혼자 펄펄 날았다. 남자팀 감독이 그를 다시 불러 줘 농구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자팀에 없다는 자리가 일주일 만에 났어요. 농구 잘하면 왕따 안 시켜요. 농구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나한테 존경 줬어요. 농구할 때 좋아요. 농구는 나의 사랑이에요. 농구 없었으면 큰 문제아가 됐을 거예요.” 지역 명문 조지아텍에 입학한 전태풍은 대학 4년간 주전 포인트가드로 활약했다. 조지아텍은 숱한 NBA 선수를 배출해낸 농구 명문이다. 그는 조지아텍 역대 3점 슛 2위, 득점 11위, 어시스트 6위를 기록했다. 졸업 후 NBA에서 뛰고 싶었지만, 작은 키(프로필에 밝힌 키는 1m80㎝) 탓인지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유럽으로 건너갔다 2009년 한국에 올 때까지 러시아ㆍ폴란드ㆍ그리스 등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7년간 유럽에서 뛰었는데, 언제부턴가 돌아다니는 게 싫었어요. 그렇다고 미국에 가고 싶지는 않았고요. 어머니의 나라에 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KCC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 거예요. 어려서 엄마를 따라 한두 번 와 본 한국에 대한 기억도 좋았고요.”



그는 한국이 너무 좋다고 했다. 하승진 같은 친구가 있고, 마음이 편하고, 음식도 마음에 든다. 스테이크보다 불고기가 더 좋고, 김치찌개는 아주 맛있다. 형ㆍ동생 질서도 잘 구분할 줄 안다. 기자가 지난달 경기 고양의 연습장에서 헤어지면서 전화로 좀 더 이야기하자고 했더니 “형한테 제가 전화할게요”라고 깍듯이 말했다.

LA 동네 친구였던 지금의 부인(미나 터너)도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같은 교회를 다니며 가까웠지만 태풍이 조지아로 이사 가고, 유럽을 돌아다녀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한국에 온 2009년 페이스북을 하면서 우연히 터너가 서울에서 영어학원 강사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태풍은 바로 연락해 만났고 2010년 여름에 결혼했다. 지난 5월엔 아들(태룡)이 태어났다.



“KBL의 귀화 선수 차별 규정 고쳤으면”

“난 혼혈”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그는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를 향한 마음이 애틋하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픔 때문이다. 그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농구를 통해서다. KCC 시절부터 그는 서울에서 경기가 있으면 구단 지원을 받아 20~30장의 표를 마련해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에게 나눠 줬다. 오리온스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지방 경기가 있을 때는 대여섯 장, 서울 경기가 있을 땐 10여 장을 마련해 나눠 준다. 서울 이태원 보광초등학교에서 열린 다문화 어린이 교실에 가서 원 포인트 농구 레슨을 해주기도 했다. “내 어렸을 때 생각하면, 부모들이 혼혈을 여기 한국서 키우는 거 아주 어려울 거예요. 마음이 아파요. 표 몇 장 구해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정도라도 아이들에게 재미 주고 싶어요.”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2010년 2만321명, 2011년 2만2014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한국농구발전연구소 천수길 소장은 “자기와 처지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유명 선수가 직접 농구를 지도해 주면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은 큰 용기를 얻는다”며 “전태풍 선수는 이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천 소장은 하나투어와 함께 다문화가정 어린이 농구팀 ‘글로벌 프렌즈’를 이끌고 있다.



한국이 좋지만 혼혈에 대한 차별도 느꼈다고 했다. ‘귀화 선수는 한 팀에서 3년 이상 뛰지 못한다’는 규정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프로농구연맹(KBL)이 ‘팀 간 전력 평준화’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KCC에서 3년간 활약한 그가 지난해 오리온스로 옮긴 이유다. “다른 한국 선수는 안 옮겨요. 나도 한국 사람인데 나는 왜 옮겨야 해요. 그런 규정이 고쳐지기를 정말 바라요.” 2009년 처음 한국에 와서 농구를 할 때는 심판이 혼혈이라고 차별하는 것 같았다. “다른 선수를 조금만 만지면 파울 부르고…, 그땐 나에게 존경 주지 않는 차별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냥 콤플렉스였다고 생각해요. 어디에나 다 있는 일이라고.”



그는 자신과 같은 혼혈이나 다문화 가정 어린이에게 특별히 잘 대해줄 필요까지는 없고, 여느 한국인과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나쁜 짓 해서 경찰서 가면 똑같이 처벌받아요. 다른 것도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나도 한국 사람이에요.”



그의 꿈은 농구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6~7년 선수로 더 뛰다 마흔 살쯤엔 지도자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고교 또는 대학의 농구 코치가 되거나 농구 교실을 여는 거다. 한국 농구의 훈련방식도 불만이다. “한국 농구는 하루 종일 ‘빡세게’ 연습해요. 야간에 슛을 100개씩 쏴야 해요. 100개씩 하면 집중력 떨어지고 어깨도 아파요.” 초등학생도 아닌 프로 선수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연습한다는 것이다. 오전ㆍ오후 1시간 정도 연습하고 나머지는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나중에 지도자가 된다면 “전 코치에게 배우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가르칠 것이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오래오래 살 거라는 그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뭔가 좋은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건 이야기로만 해서는 안 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남을 돕는 것이든, 농구를 잘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요.”



염태정 기자 yo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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