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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 뭉칫돈 뽑아가는 양복男들, 알고보니





고액 현금 거래 여전모바일 해외송금 등 수법 교묘
도마에 오른 지하경제 실태와 해법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1 2010년 11월 2일. 한 유명 제약회사 서울 본사 인근의 은행 지점에 제약회사 직원 김 모씨가 계좌를 개설했다. 사흘 새 같은 회사 직원 7명이 차례로 계좌를 열었다. 같은 달 4일부터 윤모, 장모씨 등의 명의로 이들의 계좌마다 700만~2000만원씩의 돈이 이체됐다. 돈이 들어올 때마다 누군가가 은행 현금지급기(ATM)에서 현금으로 인출해 갔다. 한 번에 1000만원 미만씩이었다. 은행의 의심거래 신고를 받은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전형적인 비자금 조성 수법으로 의심했다. 정보를 건네받은 검찰은 이 회사 대표와 경영본부장이 공사대금을 부풀려 지급한 뒤 차액 약 4억원을 직원 명의의 계좌로 돌려받은 것을 밝혀냈다. 검찰 관계자는 “직원 명의 차명계좌를 이용하고 인출 금액을 신고 기준 밑으로 맞춘 흔한 수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인근 은행 지점이나 ATM에는 이른 아침 시간에 양복 차림의 회사원이 줄을 서 5만원권 뭉칫돈을 뽑아가는 경우도 적잖다”고 전했다.



#2 2011년 8월 12일. 최모씨가 한 증권사 지점을 찾았다. 전국 규모의 식품 프랜차이즈 업체 대표인 그는 이날 18억여원을 입금했다. 현금 11억여원을 뺀 수표는 모두 10만원권. 그런데 대부분 발행 후 1년에서 3년이 지난 수표였다. FIU의 통보를 받은 국세청의 조사 결과 이 돈은 프랜차이즈 가맹점의 신규 가입이나 시설비 명목으로 받은 돈이었다. 최씨는 세금계산서가 발행되는 원재료 값 등은 법인 계좌를 통해 정상 거래하고, 영세 가맹점들이 내는 수백만원 남짓 시설비 등은 간이영수증만 써주고 따로 챙겨 수년간 모은 뒤 개인 계좌로 빼돌렸다.



#3 미술품 위탁매매를 하는 컨설팅 회사 대표 전모씨가 직원과 함께 한 은행을 찾은 것은 2010년 12월 31일. 원화 2000여만원을 1만9000달러 정도로 환전한 뒤 중국에 송금하려 했다. 처음에는 대표와 직원 개인 명의로 송금을 요청했으나, 국세청에 보고된다는 말을 듣고는 회사 명의로 송금을 했다. 은행의 통보를 받은 FIU는 전씨의 거래 내역에서 특이점을 발견했다. 수십 차례, 4억여원의 입금 거래 중 입금 상대방이 확인되는 사례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현금을 들고 와 입금했기 때문이다. 주로 중국 지역과 했던 미술품 거래도 이상했다. 같은 기간 160만 달러 이상을 그림 대금 등으로 송금했으나, 그림 수입처와 송금 상대방이 모두 달랐다. 관세청의 조사 결과 전씨는 중국 유명 화가의 그림을 밀수입한 혐의가 확인됐고, 송금은 재산 해외도피용인 것으로 밝혀졌다.



숨기는 자와 쫓는 자의 두뇌싸움

2011년 4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전북 김제 야산의 마늘밭에서 5만원권 현금다발, 총 110억원어치가 쏟아진 때문이다.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던 이모씨 형제가 친척 소유의 마늘밭에 묻어둔 현금이었다. 기상천외한 이 사건은 문자 그대로 ‘지하’ 경제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아 여전히 많은 이의 뇌리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처럼 눈에 띈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빌딩 13층. 금융위원회 FIU의 심사분석실이 입주한 곳이다. 사진 촬영은커녕 살짝 엿보기도 쉽지 않은 보안 시설이다. 여기 전산실에 모이는 정보량은 엄청나다. 전국 금융회사에서 수집된 2000만원 이상의 고액 현금 거래(CTR)가 2009년 678만 건(140조원), 2010년 1101만 건(197조원)에 이른다. 1000만원 이상의 의심거래(STR)는 지난해에만 33만 건에 달했다. FIU는 이 중 범죄나 탈세 가능성이 큰 사건을 국세청·관세청·검찰·경찰 등 법 집행기관으로 넘긴다. 지난해 국세청에 통보된 사례는 1만8000건으로 전체 의심거래의 5% 정도다. 국세청은 여기에서만 5000억원 가까운 탈루 세금을 찾아냈다.



FIU의 실무사례집을 보면, 탈세 기법은 갈수록 교묘함을 넘어 현란해지고 있다. FIU의 임병호 심사분석1과장은 “의심 거래의 형태나 입출금 시간 등 여러 자료를 경험 많은 조사관들이 분석해 탈세 같은 범법 가능성을 따져본다”고 설명했다. 가령 인터넷 도박 관련 계좌의 경우 입금자는 많은데 새벽 시간에 한꺼번에 현금 인출되곤 하는데 경험 많은 분석관들이 이런 걸 잡아낸다.

날로 첨단화하는 탈세 수법은 과세 당국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이유다. 국세청은 지난해 3월 ‘첨단 탈세 방지’ 전담팀을 만들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모바일 거래, 해외 거래 과정의 첨단 탈세범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김동일 첨단탈세방지 담당관은 “기업의 다국적 비즈니스가 늘면서 해외와의 거래 규모가 급증했다. 이전가격 조작을 통한 탈세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액 현금 거래나 복잡한 금융 거래는 탈세나 조세 회피 과정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나라만의 사정도 아니다. 중국의 경우 지하경제가 가장 발달한 곳은 중소기업이 많기로 유명한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다. 원저우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뎬당(典堂)’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전당포지만, 내용상 금융회사에 가깝다. 높은 이자를 준다며 돈을 빌려, 이보다 훨씬 높은 월 7% 수준의 폭리를 취하며 꿔준다. 현금거래가 기본임은 물론이다. 스위스나 미국처럼 투명한 나라도 지하경제 규모가 국민총생산(GDP)의 10%에 가깝다.



현금 오가는 길목 감시해야

국내에선 현금 거래 관행이 급속히 줄고 있다. 역대 정부가 신용카드 소득공제 등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결과다.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에서 PC 소모품을 파는 백종우씨는 “공(空) CD 10장에 2000원을 받는데, 이것도 카드를 내미는 손님이 많다”고 전했다. 15년째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그는 “예전만 해도 90%가 현금 거래였다”고 말한다. 그는 “현금 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이야기해도 손님들이 곱게 받아주지 않는다”고 전했다. 실제로 분식점 등 영세 식당도 매출의 90% 이상이 카드인 경우가 흔해졌다. 영세 상인들이 카드 수수료 인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현금 거래 비중이 큰 분야가 적잖다. 조원동 조세연구원장은 “예컨데 중고차 대금이라든가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의 용역료 지급을 여전히 현금으로 하는 관행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미술품·골동품 시장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 김상규 수석전문위원은 “음식점 등 자영업의 거래내역은 상당 부분 파악이 된다고 본다”며 “오히려 수백만원 이상의 큰 금액 거래를 현금으로 하면서 세원 노출을 시키지 않는 경우가 문제”라고 말했다.



특히 근래 급증하는 해외 거래를 과세당국이 수년 전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국조세연구원의 김재진 선임연구위원은 “클릭 한번에 거액이 국경을 넘어가는 시대다. 과거에는 대기업이나 가능하던 국제 거래를 중소기업이나 개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국내 현금거래보다 국제거래쪽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는 금융 거래를 과세 당국이 직접 들여다볼 수 없어 파악이 쉽지 않고, 외국과의 공조도 어렵다는 게 국세청 등의 주장이다. 국세청이 FIU에 제공되는 각종 금융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금융정보, 과세 목적에만 쓸지도 의구심

과세당국의 주장에는 반론도 적지 않다. 국세청이 개인의 금융거래를 샅샅이 살피게 되면, 공적인 이익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인 개인정보 보호 원칙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 등 일부에서는 권력기관인 국세청에 넘어간 금융 정보가 순수하게 과세목적으로만 이용될 것이냐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국세청에서 과세 정보가 새어나가서 문제가 된 적이 없다. 내부 규제가 아주 엄격하다”고 말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세당국이 금융정보를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지하경제 전체를 양성화하는 게 과연 가능한지, 또 그게 무조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지하경제가 생기는 이유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게 많은 경제학자의 설명이다. 최희갑 아주대 교수(경제학)는 “벌이가 좋지 않은 한계상황의 자영업자들의 경우 세원이 모두 노출되면 사업 자체를 접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선의의 정책이라도 이것이 가져올 부작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녕·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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