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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몸 안의 말과 몸 밖의 말

김기택
시인
밤늦게 버스 타고 집에 가는데 술 취한 노인이 탔다. 내 옆 자리에 앉더니 한동안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실제로 상대방이 있다는 듯 실감나는 악센트와 억양과 제스처를 써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어떤 일이 갑자기 떠오른 것 같았다. 적절하게 욕과 삿대질을 섞어가며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는 데 열중했다. 정말 상대방이 눈앞에 보였을까?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상대하고만 대화하는 게 아니라 제 몸 안에 있는 이들과도 자주 이야기한다. 우리 내면에는 가족은 물론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이 있다. 우리는 나이면서도 타인인 그들과 늘 이야기하며 산다. 입으로 하는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수정할 수 없는 말은 후회가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 하지만 몸 안의 타인에게 하는 말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수정할 수 있다. 친구에게 말실수했다면 마음속에서 상대방을 불러내 그게 이런 뜻이 아니고 저런 의미였다고 계속 변명을 할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속만 썩인 자식은 몸 안의 어머니를 수시로 불러내 생전에 못했던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연인이 좋아할 때까지 내면의 리허설을 할 수 있다.

 내 안의 나와 하는 말은 공상이요 허구다. 허구이지만 거짓이나 가짜는 아니다. 실제와 현실이 자신의 욕망과 결합해 변형된 것이기 때문이다. 허구는 마음이 바라는 대로 바뀐 현실이다. 몸 안에서 하고 또 했던 말을 글로 옮기면 시나 소설이 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즐거운 이유는 그 이야기가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일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그 이야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 옆 자리에서 중얼거린 노인은 제 몸 안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했던 것이다. 평소에 몸 안에 갇혀 있던 말을, 밖으로 분출하려는 에너지가 강해 언제든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말을, 술이 자극했을 것이다. 마음으로 한 말이 목소리를 입고 밖으로 나왔는데도 그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평소에 말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남들이 보기엔 과묵하지만 내면에서는 수다쟁이일 것이다. 아니면 술 먹고 중얼거리는 일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 말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몸 안에 갇혀 있었을까. 몸 밖으로 나오려고 얼마나 애썼을까.

 2주 전에 민들레예술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노숙인이나 집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나에게 집이란’을 주제로 시와 산문을 공모해 입상한 이들을 시상하는 자리였다. ‘빅이슈코리아’에 실린 이들의 수상작을 보니 몸 안에서 간절히 나와야 할 말의 힘이 느껴졌다. 몸 밖으로 분출하려는 말의 힘이 서툰 글을 밀고 나온 것이다. 글 쓰는 데 서툰 응모자들을 돕기 위해 공모 기간에 서울시의 여러 복지 시설과 작가들을 연결한 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나도 참여했지만 그들이 꼭 하고 싶은 말을 꺼내 글에 담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거친 삶을 살아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막상 글에 담으려니 몸 안의 이야기와는 딴판인 습관적인 말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먼저 그들의 마음부터 열어야 했는데 글만 가르치려 한 게 문제였다. 그래서 이번 수상작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시상식에 참석한 여러 작가는 가르친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말은 몸 안에만 있으면 어둡고 답답하다. 몸 안에 가두고 참기만 하면 말은 욕이 되거나 짜증·폭력·병이 되고 괴물이 될 수 있다. 내 안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일은 내면의 말에 햇빛을 쐬어 주는 일이다. 몸 안의 말이 강렬하면 그만큼 공격성을 띠기 쉽지만 글에 담으면 읽는 이에게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글을 쓰면 내 안에 지치고 외롭고 괴로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그 사람이 제 말을 들어줄 귀를 간절하게 찾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 몸 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문학은 내 안의 수많은 나에게 말하기이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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