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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삼국지] 유비, 여자를 짐짝처럼 4번 버리다

2013년 새해를 맞아 일간스포츠가 새 인물평 '불편한 삼국지'를 4일부터 매주 화·금요일 선보입니다. '삼국지'는 유명 작가들이 번역·각색을 시도했고, 한·중·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이지만 역사 왜곡과 허구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짜 '삼국지'를 찾아떠나는 여행은 어떨까요? '삼국지'의 영웅들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고, 그들은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김경한 작가의 '불편한 삼국지'를 통해 영웅들의 진면목을 만나보시고 불황의 시대를 이겨나가는 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유비는 마초 성향의 영웅호걸이었다. 그에게는 여자나 가족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큰 야망을 성취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렇다 보니 유비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네 번이나 처자식을 잃어 버렸다. 첫 번째는 유비가 원술과 싸우던 틈을 타 여포가 서주를 빼앗았을 때였다. 이때 여포는 유비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후일 유비가 여포와 화해하고 돌아오자 여포가 유비의 가족들을 돌려주었다. 두 번째는 다시 소패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를 여포가 고순과 장요를 시켜 무찔렀을 때였다. 유비는 하후돈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대패해 단신으로 달아났고 유비의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여포에게 보내졌다. 유비가 처자식을 다시 되찾은 것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사로잡은 후의 일이었다. 세번째는 조조에게 귀순했던 유비가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차지하자 조조가 유비를 급습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때 유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신으로 도주했다. 유비의 가족들은 하비성에서 관우가 항복할 때 다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관우의 보호 하에 무사히 유비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비는 당양장판의 싸움에서 다시 가족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운의 활약으로 감부인과 아두는 구조되었으나 미부인은 진중에서 죽었다.


▶유비, 여자도 시커먼 마음으로 골라

네 번이나 빼앗기고 되찾고 했던 부인들 중에 감부인과 미부인이 포함됐던 것이 확실하다. 감부인이 유비가 예주목이 되어 소패에 둔병하던 시절에 얻은 첩이었고, 미부인은 유비가 서주목이 되고 나서 미축의 누이동생을 첩실로 맞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유비는 여러 차례 가족들을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감부인전'에 보면 유비가 여러 차례 정실부인들을 잃었다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탁현 시절에 결혼했거나 안희현위나 고당현령을 지낼 때 맞이했던 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유비는 위기상황을 맞이하면 가족들의 안위는 생각지도 않고 늘 혼자서 몸을 빼내어 도망쳤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을 때 다시 정실부인으로 맞이한 여인이 장군 오일의 여동생 오부인이었다. 오부인은 당시 과부였다. 유언의 아들 유모와 결혼했었으나 유모가 일찍 죽었다. 유비가 허다한 미인과 명문가의 여식들을 두고 굳이 집안의 과부를 맞이한 까닭은 그녀의 관상이 황후가 될 상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되고픈 시커먼 마음에 유비는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과연 그가 그토록 닮기를 바랬던 유방의 풍모와 방불하다고나 할까. 한고조 유방은 팽성에서 항우에게 패해 달아날 때, 적의 추적을 피하고자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효혜제(孝惠帝)와 노원(魯元)공주를 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마차를 몰던 하후영이 그때마다 수레를 멈추고 다시 태워 유방의 두 자식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하후영은 조조의 직계 조상이었다. 또 오창에서 항우와 대립할 때 항우가 유방의 부친을 잡아 가마솥에 삶겠다고 위협한 적이 있었다. 유방이 한 마디 했다.

“국 다 끓이면 내게도 한 그릇 보내줘라.”

호걸답다고? 거의 사이코패스 아니면 보더패스 수준이다. 지극히 에고중심적 인간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유비의 행태도 이에 못지않았다.


▶손권 여동생, 유비의 천적

이처럼 여자를 하나의 물건쯤으로 여기는 마초적 유비도 쩔쩔매게 만든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손상향이었다. 손상향은 손권의 여동생으로 손견이나 손책을 닮아 성격이 강맹했다. 유비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늘 백여명의 시녀들에게 칼을 차고 시중들게 했다. 유비가 내심 겁이나 늘 조운의 경호 없이는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유비가 서천 정복을 떠나자 손권은 동맹을 파기할 맘으로 큰 배를 보내 손부인을 돌아오게 했다. 손부인은 유비의 아들 아두를 인질삼아 데려가려고 했다. 제갈량이 조운을 시켜 강을 차단하고 무력으로 되찾아오게 했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이릉대전에 패하자 손상향이 장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영웅 째려보기] 황제가 되고 싶었던 조폭 출신 야심가, 유비

유비(161~223)는 조폭 출신이었다. 그것도 *찬역을 꿈꾸어 온 야심가였다. 그에겐 소싯적부터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어렸을 적 동네 어린아이들과 놀면서 "나는 커서 황제가 타는 수레를 타고야 말겠다"라고 말했다가 숙부로부터 "이 놈이 집안을 망칠 놈이로구나!" 하는 질책을 들은 적도 있었다. 왕조 체제하에서 황제의 친아들이 아닌 자가 황제를 꿈꾸었다면 이는 곧 역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삼국지연의'가 유비를 미화했던 까닭에 많은 사람은 유비가 젊은 시절에 돗자리와 짚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며 모친을 봉양한 효성스런 소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돗자리와 짚신을 삼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것은 유비의 모친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유비는 그저 어렸을 적 몇 번 일을 거들었을 정도였다. 유비는 열 다섯 살에 집안사람의 도움으로 노식의 문하로 유학을 떠났다. 소년 가장 노릇할 시간이 없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유비는 동네의 건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지 생업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유비는 공손찬의 배경을 업고 탁현 일대의 조폭 두목이 됐다. 그의 주수입원은 군납업자의 뒤를 봐주는 일이었다. 유주 지방의 가장 큰 이권은 선비·오환 등 북방민족에게서 말을 사서 군대와 관청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이권이 크다 보니 상인들 간에 경쟁이 극심했다. 유비가 나서 탁현의 이권사업을 그 지역의 대상인들인 장세평과 소쌍이 독점할 수 있도록 양분해 주었다. 유비는 이들로부터 상납을 받아 조직을 유지했다. 그 시절 가장 두드러진 조직원들이 관우와 장비·간옹 등이었다.

유비는 야망이 컸다. 유비를 일컬어 '효웅(梟雄)'이라 한다. 이는 매우 사납다는 뜻도 있지만 결코 남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발주자였던 유비는 장수나 유훈 등 그보다 더 유력한 군벌들조차 원소나 원술·조조 등 대군벌들에게 무릎 꿇고 들어가는 것이 대세인 상황에서도 끝내 남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다른 군소군벌들과 달리 유비가 끝내 남의 부하가 되지 않았던 까닭도 그의 가슴속에 언젠가 황제가 되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끝까지 살아남아 비록 한 구석 땅덩이라도 차지해 황제가 된 것은 야망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상당한 수완이 있었다. 첫째 유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아무 세력이 없었던 그를 관우·장비·조운 등이 끝까지 따라다닌 이유이다. 둘째 유비는 무한수탈을 반복하는 당시의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 관할 구역 내에서 비교적 선정을 펼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민심의 중요성을 알았다. 셋째 유비는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초야에 묻혀있던 제갈량을 영입했을 뿐더러 위연·마충·이회·등지 등 실무형 인재들을 발굴해 내었다. 무엇보다도 유비는 스스로를 잘 포장할 줄 아는 홍보의 귀재였다. 조조가 난폭한 행동을 민심을 잃게 되자 유비는 그와 반대로 행동하는 전략을 취한다.

“지금 나에게 물과 불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자는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느슨해야 하고, 조조가 난폭하면 나는 어질어야 하며, 조조가 속이고 기만하면 나는 충성스럽게 행동해야 하오. 매번 조조와 반대로 처신하였기에 마침내 일을 이룰 수 있었소.”

마지막으로 유비는 지피지기 능력이 탁월했다. 유비는 자신이 재능이 조조에 미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조의 깃발만 보고도 놀란 토끼처럼 달아났다. 조조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틈새 전략을 취했기에 그나마 살아남아 한나라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거짓말 벗겨보기]

유비는 중평원년(184)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발이 늦었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가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하는데 제일가는 공을 세웠고, 동탁에 대항에 일어난 산동반군에 가담해 화웅을 참수하고, 호뢰관 싸움에서 여포를 패주시키는 등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화웅을 죽이고 여포와 동탁을 격파해 패주시킨 것은 모두 손견이 한 일이었다.


▶ 주

*효혜제=유방에 이어 7년 간 통치(기원전 195~188).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여걸' 여태후의 아들이기도 하다.
*찬역=왕위를 빼앗으려 음모를 꾸밈.


▶김경한은 누구?

김경한은 '삼국지연의'의 허구성을 벗기고 위·촉·오 삼국시대를 정사 위주로 재구성해 눈길을 끌고 있는 '김경한 삼국지'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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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