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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7> 칸첸중가(하)

네팔 동쪽에 있는 인구 2만 명의 작은 도시 타플레중(Taplejung)에서 칸첸중가(8586m) 베이스캠프까지는 걸어서 꼬박 열흘이 걸렸다. 고생 끝에 찾았지만 ‘큰 눈 위에 있는 다섯 개의 보물’로 불리는 봉우리 중에서 칸첸중가와 얄룽캉(8505m), 캉바첸(7902m)만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봉(8482m)과 남봉(8476m)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 고운 셰르파 여인이 명함을 내밀었다 “한국 간 내 남편 회사, 좋은가요”

10월의 히말라야는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춥고 황량했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살아가는 히말라야 고산족의 진한 삶이 있었다.



칸첸중가(네팔)=김영주 기자 사진=이창수 사진작가



야크가 마른 풀을 뜯는 평화로운 팡페마(5140m) 평원. 그러나 칸첸중가(가운데) 북서벽은 폭풍설에 휩싸여 있다.


10월에 만난 초겨울의 히말라야



칸첸중가의 베이스캠프가 있는 팡페마(Pangpema·5140m). 팡메마까지 가는 길은 험했다. 트레킹 중간 거점인 군사(Gunsa·3410m)에서 이틀을 자고 캄바첸(Kambachen·4150m)과 로낙(Lhonak·4790m)에서 이틀을 더 야영하며 전진해야 했다.



 하루에 걷는 거리는 10㎞ 남짓이었지만 3000m를 넘어서면 어김없이 고소 증세가 찾아든다. 트레커는 보통 군사에서 하루 정도 더 머무르며 휴식을 취한다. 몸 안의 장기들이 고소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고소에서는 눈동자도 천천히 굴리라’는 말이 있다.



 지난해 10월 21일 군사에서 냉기 가득한 아침을 맞았다. 온도계는 섭씨 0도. 불과 며칠 전까지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다 느닷없이 만난 겨울 날씨는 당혹스러웠다.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여정을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히말라야 고산 마을은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이 머문 셀레레 로지(산장)의 마당은 흰 서리가 잔뜩 내렸다. 볕을 받은 흰 서리는 보석처럼 빛났다. 외양간 없이 밖에서 밤을 지새운 야크(Yak)의 머리 위에도 서리가 앉았다. 거추장스러울 만큼 털이 많이 난 녀석들은 한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염한 자세로 몸을 꼬고 앉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이 산의 진정한 주인이다.



 군사 마을은 12월이 되면 ‘사람 없는 마을’이 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는 한겨울 최대 적설량이 1.5m가량 되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다. 주민들은 야크 떼를 몰고 마을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팔레(Phale·3180m)까지 내려가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올라온다. 마을 어귀, 경찰서에서 만난 로나 머거르(25)는 “겨울철, 사람 없는 마을의 근무는 힘들지만 다른 곳에 비해 월급이 많기 때문에 지원자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한 달 2만5000루피(약 36만원)를 받는다고 했다.



트레커의 끼니를 책임지는 일꾼들이 짐을 가득 지고 고개를 넘고 있다.


혹독한 겨울과 싸우는 고산족



군사 마을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면 길이 더 험해진다. 칸첸중가 빙하에서 흘러내린 급류가 계곡을 후벼 파듯 거칠게 흐른다. 계곡 양옆으로 늘어선 잎갈나무 단풍이 끝나는 고도 3500m 지점부터 황량한 계곡이 시작된다. 산사태로 쏟아져내린 화강암 지대를 통과하고,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 옆을 지나기도 한다. 급경사 길을 네댓 시간 오르면 캄바첸 야영지다. 티베트 방향 북쪽 빙하와 북동쪽 칸첸중가 빙하가 만나는 지점으로 돌을 쌓아 간신히 바람을 막은 세 채의 움막이 있다.



 셰르파 타시(44)의 움막은 가난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살림이라곤 새까맣게 그을린 물주전자와 냄비, 스테인리스 접시 몇 개뿐이었다. 식량은 감자 한 포대와 밀가루, 시렁에는 시래기처럼 바짝 마른 야크 고기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군사가 집인 타시는 봄과 가을에 야크를 몰고 이곳까지 올라온다. 낮에는 야크 젖을 짜고, 저녁이 되면 트레킹 팀을 따라 올라온 짐꾼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돈을 번다. 한 사람에 150루피(약 2000원)를 받는다고 했다.



 살 떨리는 추위를 다스릴 방법은 장작불뿐이었다. 4000m 이상에는 둥치 큰 나무가 없기 때문에 향나무로 땔감을 한다. 움막을 휘감은 매운 연기가 눈을 따갑게 했지만, 한 줌의 온기가 아쉬워 불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캄바첸에서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험난한 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쿰바카르나(Kumbhakarna·7710m) 북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쿰바는 ‘어깨’를 뜻한다. 뾰족한 주봉의 좌우로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쿰바카르나는 기원전 3세기의 시인 발미키(Valmiki)가 지었다는 인도 신화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신화 속 쿰바카르나는 용감한 전사이지만, 닥치는 대로 먹어도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불운한 운명을 타고났다. 결국 힌두의 주신 중 하나인 브라마에게 밉보여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일까. 수직으로 솟은 북벽은 볕이 드는 시간이 두세 시간에 불과하다. 그늘진 벽은 마치 악마가 검은 망토를 두른 것처럼 암울하다. 단, 해 질 녘 석양을 받으면 망토가 불에 타듯 벌겋게 달아오른다. 북벽은 지난 2004년 러시아 원정대에 의해 초등됐다. 그러나 자연적인 방식의 등반이 아닌 벽에 구멍을 내고 인공 구조물을 설치한 채 겨우 올랐다.



 일 년 중 반년을 이 벽을 바라보며 사는 타시에게 “쿰바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쿰바는 신(God)이다.” 네팔의 고산족에게 산은 그 자체로 신이다.



로낙(4790m) 야영지. 여기서부터 혹독한 추위가 시작된다.


고산족 여인들의 고된 삶



캄바첸에서 이틀을 더 걸어 팡페마에 닿았다. 팡페마는 칸첸중가 북서면에서 흘러내린 빙하 둔덕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군사 마을 사람들이 야크를 방목하는 마지막 초지이기도 하다. 몇 발짝 앞으로 나서면 살벌하게 아가리를 벌린 크레바스 지대로 떨어지고 만다. 둔덕 가장자리에 서면 칸첸중가와 얄룽캉·캉바첸 세 봉우리가 보인다. 그러나 전망은 그리 좋지 않았다. 험난한 여정에 비교하면 허망할 정도다. 남쪽으로 뻗은 칸첸중가 중앙봉과 남봉은 보이지 않았으며, 칸첸중가 정상부는 폭풍설이 일어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단지, 두려울 뿐이었다. 이 벽은 1999년 이후 아무도 등정을 시도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팡페마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러나 일행 다섯 명 중 둘은 고소 증세를 호소하며 하산해야만 했다. 거친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밤새 텐트를 때렸다. 추위에 떨며 보낸 밤은 뼛속까지 시렸다. 이튿날 이른 아침, 사흘에 걸쳐 올라온 길을 7시간 만에 내달리듯 내려왔다.



 가볍게 내려오는 길, 힘겹게 올라갈 때와는 달리 고산족의 생활상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험난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삶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찾은 군사 마을, 셰르파 밍마(52)의 셀레레 로지엔 아름다운 셰르파 여인이 한 명 있었다. 희고 고운 얼굴에 티베트 전통 양식의 옷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은 한눈에 봐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밍마의 첫째 며느리인 치링(25)이었다. 나흘 전 카트만두의 병원에서 아들을 낳고 다음 날 퇴원해 우리가 6일에 걸쳐 올라온 길을 3일 만에 왔다고 했다. 짐꾼들과 밍마의 가족들은 “여기는 다 그렇다”고 말했다.



 그나마 치링은 특별한 대우를 받은 편이었다. 군사에서 가장 큰 로지의 며느리라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대부분은 집에서 아이를 낳고 다음 날 아침 부엌일을 한다. 예전 우리의 어머니들과 다름없었다. 치링은 “남편은 작년에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이 다니는 한국 회사의 명함을 보여주며 “좋은 회사냐”고 재차, 삼차 물었다. 내역을 알 수 없는 회사였지만 “좋은 회사”라고 답해주었다. 치링과 밍마는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남편을 만나려면 2년을 기다려야 해요. 그때까지 로지의 사우지(여주인)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하산길의 세카툼(1650m)에서도 한 여인을 만났다. 지난 10월 17일 칸첸중가로 올라가는 도중에 만난 마야(18)다. 우리 일행은, 배가 불룩하게 나온 채로 장작을 패는 마야가 안쓰러워 마당에 있는 통나무를 모두 패서 땔감을 마련해주고 갔었다. 마야는 도끼를 놓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해산했다. 마야는 집 앞을 지나는 짐꾼들에게 팔 음식을 장만하는 와중에도 짬짬이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마야의 살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소녀 같은 아낙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히말라야 고산 마을마다 어린아이들이 넘쳐났다. 히말라야 신의 축복이다.





●칸첸중가 등반 역사=세계 3위봉 칸첸중가는 히말라야의 많은 거봉 중에서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다. 인도의 다르질링 평원에서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첫 탐사에 나선 이들은 19세기 중반 이곳에 거주한 영국인들이었다. 세계 초등의 영광 또한 1955년 로버트 찰스 에반스 대장이 이끄는 영국원정대가 가져갔다. 1910년부터 2011년까지 100여 년 동안 칸첸중가에 도전장을 낸 원정대는 137개 팀이었다. 대부분 위험한 북면보다는 남면을 택했다. 등정자는 191명(한국 산악인은 10명)이다. 8000m 14개 봉우리 중 안나푸르나(8091m) 다음으로 적다. 루트가 험하고,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 산에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은 43명. 전문 등반가가 아니면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망자 수 또한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칸첸중가 여행 정보=칸첸중가 정상을 등정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는 북면과 남면 두 곳에 꾸려진다. 북면 베이스캠프는 지난 1999년 한국원정대 이후 찾는 산악인이 없어 명맥이 끊겼다. 남면 루트에 비해 눈사태 등이 잦아 위험하기 때문이다. 남면은 해발 2000m에 있는 암푸딘(Amphudin) 마을을 거점으로 삼는다. 베이스캠프는 왕복 열흘 정도 걸린다. 트레킹 허가증인 TIMS(트레킹정보관리)카드 외에 칸첸중가보존지역 허가증과 입장료를 따로 내야 한다. 국내의 ‘M투어(02-773-5950)’ 등 히말라야 전문 여행사에서 여행상품을 내놓고 있으며, 3주 일정에 비용은 600만 원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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