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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원 일장춘몽’ 꾼 반복동, 인천 최고 미녀와 결혼

명동에 있던 경성주식현물거래소. 산업시설이 없던 일제 시대에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투기판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1930년대 3대 투기사업은 금광, 기미(期米:미곡 거래), 주식이었다. 기미란 장기 거래를 목적으로 매매되는 양곡을 뜻한다. 기미는 미두시장(米豆市場)에서 거래됐는데 1896년 최초의 미두시장인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가 문을 연 곳은 인천이었다.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주식회사 인천미두취인소를 열었던 것이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⑩ 주식 부자

식민지에 공장을 세울 자본이 없었던 일제는 식민지 최대 산업인 쌀을 투기상품으로 만들어서 1930년대까지 기미가 3대 투기사업이 된 것이다. 일제 때 미두시장의 거래 형태는 주식처럼 선물(先物)거래와 현물거래가 있었다. 미래의 일정한 시기에 미곡을 넘겨주겠다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미곡이 기미였다. 그래서 선물거래를 청산거래(淸算去來), 투기거래(投機去來)라고도 불렀다. 정기거래는 보통 3개월이 기한인데 현물이 없어도 거래가 되는 반면 실물가격의 변동에 따른 반대매매를 통해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손실을 볼 수도 있지만 큰 자본이 없어도 증거금과 수수료만 있으면 막대한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일제는 1931년 ‘조선취인소령(朝鮮取引所令)’을 시행해 인천미두취인소를 주식시장이었던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과 합병시켜 조선취인소 기미부(朝鮮取引所期米部)를 만들어 더욱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쌀과 주식 투기에 나섰다. 농본(農本) 사상을 갖고 있던 조선인들이 쌀을 투기 수단으로 삼는 것에 주저하는 동안 미두시장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되기를 기다리는 쌀가마들. 일본인들은 쌀을 투기상품으로 만들어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그러자 여기에 맨손으로 뛰어들어 거부가 되는 조선인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천의 백만장자 반복동(潘福童)이 그런 인물이었다. 반복동은 무일푼으로 인천의 미두시장에 뛰어들었는데 점차 기미거래는 물론 이와 결부된 주식에도 눈을 뜨게 되면서 인천의 미두시장과 주식시장에서 100만원이란 거금을 거머쥐었다. 인천 만국공원 아래의 경치 좋은 곳에 양옥을 지은 반복동은 인천 제일 미녀에게 장가가면서 숱한 화제를 뿌렸다. 혼인 장소인 서울 조선호텔에 재계의 유수한 부호가 총출동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반복동이 가는 곳에는 지전뭉치가 풀풀 날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쉽게 번 돈 쉽게 쓰다 보니 어느덧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1935년 무렵 인천에서 사라져 소식을 아는 사람조차 없어졌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일장춘몽(一場春夢)의 전형으로 자주 회자됐다.

경찰 출신 유영섭, 돈 벌어 운수업 진출
보통사람들이 주식이란 용어 자체를 잘 모를 때 주식시장의 가장 큰손은 은행들이었다. 1935년 9월께 조선은행이 700만~800만원, 상업은행이 600만~700만원, 동일은행(東一)이 400만원, 한성은행(漢城)이 200만원, 해동(海東)은행이 100만원 정도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으로는 서울 내자동(內資洞)의 구창조(具昌祖)가 주식시장의 행운아였다. 구창조도 일개 소상인에 불과했지만 주식에 눈을 뜬 후 전 재산을 주식에 투자했다. 때마침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전쟁 특수가 일면서 몇 년 사이에 백만원대의 거부가 되었다. 구창조를 보고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깡통을 차기 일쑤였다. 그러나 구창조는 1935년에도 주식시장의 큰손으로 건재해서 세간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주식시장에서 거금을 거머쥔 후 발을 뺀 인물이 주식계의 행운아로 불렸던 서울 화동정(花洞町:현 종로구 화동)의 유영섭(柳泳燮)이었다. 유영섭은 함흥에서 경찰 노릇을 하다가 식민지 경찰에 회의를 느꼈는지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생활난에 쪼들리는 룸펜(lumpen:실업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인천 미두시장 김태점(金太店)의 점원 겸 시장(市場) 대리인이 되면서 기미와 주식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몇 푼 안 되는 급료를 모아 겨우 몇백원의 자금을 만들었다. 유영섭은 서두르지 않고 기미와 주식에 투자해 자본을 불려나갔는데 그러는 사이 불과 5∼6년 만에 50만원의 거금을 모았다.

그런데 유영섭은 기미시장과 주식시장이 허깨비 같은 시장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성공한 한 명보다 실패한 수천, 수만의 사람에 주목했다. 그래서 유영섭은 50만원을 손에 쥐자 미련 없이 기미와 주식시장을 떠나서 ‘다른 건실한 실업 방면’으로 옮겼는데, 건실한 실업 방면이 바로 자동차 사업, 즉 당시 한창 뜨던 운수업이었다. 유영섭은 1936년에는 근화(槿花)여학교 건축비로 500원을 희사하기도 했다.

그때도 주식시장에는 이런저런 소문이 무수히 떠돌아다녔다. “전라도 부호 김씨가 주식시장에서 80만원의 이익을 보았다더라” “평안도 부호 최씨가 서울 명치정(明治町:명동)의 주식중매점을 통해 근 100만원의 이익을 보았다더라” “서울 남대문통의 상인 이씨가 주식으로 큰 이익을 보았다더라” 같은 소문이 주식시장을 떠돌아다녔다.

이런 소문들과 함께 드디어 주식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1934년 1월 설립된 동아증권주식회사(東亞證券株式會社)가 그런 회사로서 자본금 50만원에 주식 중개가 주 업무였다. 동아증권 사장인 30대 중반의 조준호(趙俊鎬)는 소론(少論) 계열의 대표적 매국적(賣國賊) 조중응(趙重應)의 재종(再從:6촌) 조중정(趙重鼎)의 장남이었다. 당파를 막론하고 매국적의 특징은 갑부라는 점이었다. 조중정도 장안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조준호에 대해 삼천리(1936년 12월호)가 ‘투기계(投機界)에 발을 디딘 지 불과 3년여 만에 수십 년래 그 업계의 백전노장 취인원(取人員:주식중개인)들을 발아래 꿀렸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성공은 괄목할 만했다. 이 시기에 주식시장과 쌀 투기시장은 한 몸이었다. 조준호도 인천의 해안가에 기미취인점(期米取引店)을 열어 쌀 투기를 병행했다. 조준호에 대해 삼천리 1936년 12월호는 ‘저 유명한 2·26사건을 명민한 두뇌로 기미에 활용해 불과 6~7개월 만에 20만원이라는 거액의 이득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조준호는 2·26 사건 때 베팅 걸어 대박
2·26사건으로 돈을 벌었다는 이런 사례가 이 시기 투기자본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준다. 2·26사건이란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내 황도파(皇道派) 청년장교들이 ‘일왕친정(日王親政)’과 ‘소화유신(昭和維新)’을 기치로 1500여 명의 사병을 이끌고 일으켰던 쿠데타를 뜻한다. 쿠데타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사건 와중에 제3대 조선총독이었던 내대신(內大臣)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살해되는 등 일본 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는 일본 경제를 이끌어가는 견인차였던 군부가 정당과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국가를 직접 통치하려던 데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극도의 불안심리가 퍼졌을 때 조준호는 일반인과는 거꾸로 베팅했고 이것이 성공했다는 뜻이다. 당시 투기시장은 일본 군부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는데 육군상(陸軍相)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국제연맹에 머물러 있으면 일본은 마음대로 군사행동을 취할 수가 없다…. 반드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엄청난 인기를 끌 정도로 일본은 극우파가 주도하는 집단정신병 상태에 접어들었다. 불황을 단숨에 날려버렸던 만주사변의 향수가 확전(擴戰)을 부추겼다. 국제연맹 탈퇴 직후인 1933년 8월에는 외국의 공습을 가정해서 대대적인 방공연습을 할 정도로 확전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의 투기꾼들도 확전을 열망하는 호전광(好戰狂)으로 변했다. 집단정신병이 식민지까지 전이된 것이었다. 삼천리 1935년 11월호는 ‘앞으로 세계대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주식시장이 크게 상승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전쟁이 터져 장차 이 싸움이 세계대전에까지 미칠 듯하자 재계(財界)는 의연하게 호경기(好景氣)를 띠어 요즈음 주식시장의 경기는 도쿄·오사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명치정(明治町:명동)의 금융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놀라운 활기를 띠어 사람들의 얼굴엔 희색(喜色)과 초조의 빛이 흐르고 있다.(삼천리 1935년 11월호)”

일제는 드디어 1937년 7월 북경 남서부의 중국군을 공격하는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확전에 의한 전쟁특수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삼천리 1939년 1월호는 ‘전쟁과 주식시장’이란 최창호(崔昌鎬)의 도쿄발 논설을 싣고 있는데 “지나사변(중일전쟁) 발생 이후의 주식시장은 날로 부진을 거듭하여 간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최창호는 ‘지나사변이 장기전에 들어감이 명확해짐에 따라 시장은 또다시 낙조(落潮)를 보였다. 금일의 시장은 반신불수(半身不隨)의 노쇠경(老衰境)에 도달한 감이 있다’고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쟁 도발=주가 급등’이란 공식도 일본군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무너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해 왔던 조폭국가 일본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다름 아닌 전쟁이었던 것은 조폭국가의 당연한 말로였다. (‘식민지 부호들’ 끝. 다음부터는 ‘폐허와 희망’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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