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금융 가문 건달 도련님, 보르도 와인 세계화 이끌다

http://www.weinwolf.de
18세기 말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게토(유대인 격리구역)를 박차고 홀연히 나타나 유럽의 금융왕국을 만든 로스차일드 가문은 음모론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이들 음모론자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금융과 통화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직·간접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고 한다. 러시아 공산혁명과 이스라엘 건국도 로스차일드가(家)의 배후 영향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질시에 의한 과장일 수도 있다. 다만 로스차일드 가문이 단 한 세대 만에 유럽금융과 원자재시장, 그리고 철도 등 수송망을 장악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프랑스 명문 와인 ‘샤토’ 일군 필립 드 로실드

가문의 시조 격인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원래 姓은 바우어)는 다섯 명의 아들을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빈, 나폴리 등지에 배치해 유럽 금융망을 구축했다. 국가 간 전쟁이 빈번하고 식민지 쟁탈전에 매달렸던 당시 유럽 군주들은 로스차일드가의 재정지원에 크게 의지했다. 교전 당사국 모두에 돈을 빌려주고 종전 후 높은 이자가 붙은 원금과 함께 주요 이권사업을 얻어냈다. 그래서 로스차일드가는 일약 유럽 정치·경제의 숨은 실력자가 됐으며 또 가문의 후손들은 각국에서 귀족 반열에 올랐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프랑스계 후손
이들 중 영국과 프랑스에 자리 잡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영국은 금융, 프랑스는 자원 개발과 수송망 독점으로 특화됐다. 프랑스에 정착한 막내 제임스(야콥)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우선 금융업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전쟁 말기부터 패전만 거듭하던 프랑스는 로스차일드가의 재력에 크게 의존했다. 대신 커다란 이권을 주었다. 파리와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다.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남태평양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니켈,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바쿠 유전개발권을 얻어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은 2∼3대에 와서는 포도주 생산에 손을 댄다. 보르도 메독 지역 포이약(Pauillac) 적포도주다. 지금도 1855년부터 1등급을 얻은 보르도 레드와인 5대 샤토(Chteaux:원래는 城이란 의미지만 보르도 지역에서는 포도주 양조장을 뜻함) 가운데 샤토 라피트 로실드와 샤토 무통 로실드 등 2개 샤토에서 포도주를 생산했다.

프랑스 포도주의 양대 산맥은 부르고뉴와 보르도다. 부르고뉴에는 최고급 포도주가 많다. 대신 보르도는 1등급부터 대중 와인까지 다양하다. 필립 드 로실드(Philippe de Rothschild·사진)는 보르도 적포도주의 고급화와 세계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필립은 1902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학업에 별 뜻이 없었다. 기본 교육을 받은 후 가문의 주력업종인 금융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한량으로 지냈다. 시나리오 집필과 영화·연극 제작으로 시간을 보냈다. 유명 여배우 몇 명과도 어울렸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삶을 싫어한 그는 카레이서로 나섰다. 여러 차례 경주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가 몰던 경주용 빈티지 카 ‘부가티’는 지금도 자동차 수집가들이 많이 찾는 차종이다.

필립은 1920년부터 포도주 생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문 소유의 2개 샤토 중 샤토 무통 로실드에 주력했다. 그는 한 가지 획기적인 방안을 고안했다. 1924년 이전까지 보르도 포도주는 생산 후 나무통에 담아 중간 상인들에게 넘기면 이들이 포도주를 병에 담았다. 그런데 필립은 이 전통을 깨고 양조장에서 바로 병에 담는(Mise en bouteille au Ch<00E2>teaux) 방식을 창안해 포도주의 품질을 보증했다. 도매상들이 간혹 질 낮은 포도주를 섞는 등 여러 가지 농간을 부려 유명 샤토의 명성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다른 유명 샤토에도 파급됐고 지금도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32년산 포도의 질이 떨어지자 그는 1등급 생산을 중단하고 대중적 와인 무통 카데를 개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위기를 호기로 전환시킨 수완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최초로 병 라벨에 마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등 유명 화가의 그림을 넣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알제리로 피신했다. 그러나 비시 정부의 비밀경찰에 잡혀 감금됐다 석방된 후 영국에서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끈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해 대독(對獨) 항쟁을 벌였다.

신대륙 와인 도전엔 제휴 전략 펼쳐
종전 후 포도원과 양조장 재건작업을 거쳐 생산과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60년대에 들어오자 프랑스 와인이 신대륙(캘리포니아·칠레·호주 등) 와인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소모적 경쟁을 하는 대신 이들과 제휴해 새로운 고급 와인을 생산했다. 캘리포니아 로버트 몬다비사와는 오퍼스 원을 합작했다. 칠레에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 주조기술을 제공해 콘차이 토로 와인을 생산했다. 또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5개 품종을 혼합해 주조하는 보르도가 피노 누아르 단일 품종으로 주조되는 부르고뉴 와인에 비해 수송 중 잘 변질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살려 보르도 포도주의 수출도 적극 추진했다. 젊은 시절 부잣집 건달도련님이었던 그는 보르도 포도주의 세계화를 이룬 공적을 남기고 88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인들은 80년대 이전까지 포도주가 ‘골 때리는 술’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유수 의학자들이 붉은 포도주가 심장병에 좋다고 하자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도 포도주 붐이 일어났다. 그런데 여기에도 여지없이 속물주의가 나타났다. 너나 할 것 없이 최고급만 찾아댄다. 물론 비싼 와인은 그 값을 한다. 그러나 중·저가 와인 중에도 품질 좋은 것이 많이 있다. 어차피 짜고 맵고 양념 많은 한국 음식과 포도주의 조합도 쉽지 않다. 심지어 최고가 와인을 두어 병 사다가 장식장에 넣어 둔 채 오가는 손님들에게 자랑만 하고 시음은 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아마 그 고가 포도주도 식초가 되었을지 모른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