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근원에 대하여

몇 주 동안 TV 드라마 한 편을 보느라고 꽤 고생했다. 가족 문제를 잔잔히 다룬 드라마였는데 우연히 본 몇 장면이 아주 재미있어서, 아예 인터넷TV로 들어가 1회부터 새로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 수십 회분을 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보다가 잠을 설친 날이 여러 번이었다.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과 우연의 남발도 드라마의 흡인력과 감동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 드라마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대중 드라마의 스토리 구성에는 기본 원칙이 있다고 한다. 선과 악의 대결구조가 선명할 것, 선한 쪽이 심한 고난을 당할 것, 하지만 선한 쪽이 견디어내어 마지막에 승리할 것 등이다. 오락 삼아 보는 드라마 속에 이런 원칙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이 통하는 이유는 이것이 사람의 근원적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거짓과 악 대신 진실과 올바름에 대한 믿음이 스토리를 이끄는 모티브다. 불의가 판치는 혼란스러운 사회지만 사람들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목마름이 크고, 근원적인 가치를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이다.

30여 년을 재판하면서 깨닫게 된 것도 사람에게는 ‘의로움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점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불의를 대하면 본능적인 반응이 일어난다. 심지어는 법정에 선 상습범죄자가 다른 피고인이 저지른 비열한 행동에 대해 크게 분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사람에게는 선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고, 영속적이며 근원적인 무엇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안에 근원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살고 있다. 보이는 것, 이익이 되는 것만 찾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근원적인 것은 정신적 골동품이 되어 마음 깊은 곳에 처박혀 있는 셈이다. 미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빈발하는 것, 우리나라에서 자살자가 매일 40명이 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삶에 대한 극단적 절망이 근본 원인 아닐까. 절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가 타인을 향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을 향하면 자살하게 된다. 절망은 자기 내면에 있는 근원과 단절될 때 일어난다. 반대로 근원적인 것과 연결되면 생명이 충만해지고 깊은 안정감과 평화가 온다.

근원이 주는 힘을 확증하는 한 예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을 들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알코올 중독자가 자기 힘으로 삶을 통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힘에 자신을 맡긴 채 치유의 힘을 믿는 것이 핵심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주관하며 책임진다는 마음을 버리고 근원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다. 이 모임은 가장 성공적인 중독자 치유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았고, 다른 치유 과정에도 활용되고 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삶의 의미는 상황이 아니라 근원에서 나온다. 그는 많은 노이로제나 정신병은 자기 삶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원에 대한 이해를 체계적으로 구성해 의식적으로 따를 수 있게 한 것이 종교라 하겠다. 종교는 이 세상에 확실한 근원이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우주에 물리법칙과 질서가 존재하고, 사람의 내면에 도덕률과 가치의식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부처님, 도 등 종교상 교리는 달라도, 우주의 근원실재에 의해 세상과 인생이 움직인다는 믿음은 동일하다. 근원의 힘을 믿고,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은 외적인 종교생활을 하건 안 하건 유신론자라 하겠다.

불교에서 마음에 여래를 품고 사는 사람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마음이 번뇌로 덮여 있지만, 그 안에 근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자 불트만은 변화된 신앙인의 삶을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헛된 것에게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존재방식”이라고 말했다. 근원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통속적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된다. 삶에 지속적인 변화가 생기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제 올해가 이틀 남았다. 이 시간이야말로 잠시 일상을 멈추고, 내면 깊은 곳, 근원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할 때 아닐까.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