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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손숙과 강효를 이어준 기억

정진홍
논설위원
# 1963년 연극 ‘상복을 입은 엘렉크라’로 데뷔한 배우 손숙은 어느 날 서울 필동의 효성의원을 찾았다. 일본식 목조건물 1층에 있던 그리 크지 않은 병원 안은 마치 여느 집의 작은 응접실 같았고 그곳엔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의사 한 분이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히포크라테스 선서’ 그 자체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강동완! 일제 강점기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나온 내과의사이자 박사였던 그는 몸의 아픈 곳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료받으러 온 이들과의 잔잔한 대화 속에서 그들의 마음의 상처와 영혼의 상흔마저 어루만졌다. 배우 손숙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배우는 3대가 기도해야 나온단다. 그러니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말고 분발해라.” 배우 손숙은 그 말을 평생 마음에 담아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스스로 지켜올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 환자가 없는 시간에도 변함없이 병원을 지키고 있던 의사 강동완이 틈만 나면 하는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괴테의 『파우스트』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책 출간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세 아들 건, 진, 효에게 보내주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거의 매일같이 파우스트의 몇 문장을 번역해 거기에 주석을 달고 그에 연관된 자신의 단상을 담아 보냈다. 일상에서 편지는 사라지고 e-메일 보내는 것도 귀찮아 카톡과 문자로 ‘슝’소리를 내며 단문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이 시대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이렇게 보면 그 시절이 비록 가난했지만 더 행복했고, 힘겨웠지만 더 인간적이었는지 모른다.

 # 뉴욕의 줄리아드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던 셋째 아들 효는 파우스트의 번역문과 주석 그리고 단상이 담긴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볼 때마다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서울대 음대를 다니다가 64년 도미해 유학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가난한 나라의 젊은 음악학도가 몇 분간 선보인 단 한 번의 연주를 들은 후 전격적으로 후견인이 돼줬던 바이올리니스트 벌 세노프스키가 그해 내한공연 개런티 500달러를 몽땅 유학비용으로 제공한 덕분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함은 물론 자기 집에서 숙식하도록 배려해 줬다. 하지만 유학기간 내내 아들 효의 내면을 붙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편지였다. 그 후 그는 마침내 줄리아드 음대의 교수가 돼 지난 35년 동안 장영주, 길 샤함, 김지연 등 바이올리니스트와 리처드 용재 오닐 같은 비올리스트 등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제자를 키워냈다.

 # 몇 해 전 줄리아드 음대의 작은 강의실에서 강효 교수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학생이 연주하는 내내 듣고 기다려줬다. 그러곤 연주가 끝난 후 그 특유의 조용하고 온화한 말투로 몇 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묵묵히 보낸 ‘파우스트 편지’와 다를 바 없었다.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부쳐 온 아버지의 편지가 아들을 키웠듯이 다시 그 아들 강효는 전 세계의 수많은 제자를 줄리아드 음대와 예일대에서 그렇게 키워냈다. 그 묵묵한 기다림 속에서 기적은 또다시 기적을 낳은 것이다.

 # 그제 저녁 배우 손숙과 강효 교수가 한자리에서 만났다. 처음 만난 두 동갑내기는 한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젊은 시절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줬던 의사 강동완과 유학 간 아들에게 ‘파우스트 편지’를 써서 보낸 아버지 강동완을 둘은 각각 그러나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이 세밑에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라고. 이 물음 앞에 그 누구도 비켜설 수 없다. 결국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이 물음 앞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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