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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원래 나꼼수팬…朴 30분만난후 달라지더라"

새누리당 조동원 전 홍보기획본부장이 28일 당을 떠나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는 “빨간 머리 이미지가 고정돼 염색물이 빠지니 사람들이 못 알아보더라. 아쉽지만 내 전략이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안성식 기자]
광고 카피라이터 조동원(55). 그는 평생을 광고쟁이로 지내왔다. 한때 영화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쟁이’였다. 그랬던 그가 새누리당에 들어왔다. 생뚱맞았다. 험한 여의도 정치판에 광고쟁이의 출현은 그랬다. 성향도 달랐다. 그는 스스로 “골수 야당 성향이고 나꼼수(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팬”이라고 했다. 새누리당에 들어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는 박근혜를 만나면서 인생의 샛길을 걷는다. 지난해 1월 광고계 후배를 통해 영입 제의가 왔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 그 후배가 자꾸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보라고 졸랐다. 문득 만나는 거야 어떨까 싶었다. 거기서 그의 인생에 ‘외도’라는 점이 찍힌다. “건전한 정당의 한 축인 한나라당이 잘돼야 하지 않겠느냐. 당신의 역량이 필요하다”는 박 위원장의 말에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30분 만나면서 박 위원장에게서 신뢰감·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했다. 새누리당에서 그가 얻은 타이틀은 홍보기획본부장.

 그로부터 1년.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이제 대통령 당선인이 됐다. 그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당의 상징색이 빨간색으로, 당명이 새누리당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새누리당을 등지고 다시 광고판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는 2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 만나야만 생명력을 얻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떠난다는 것이다.

 조동원은 광고업계에선 ‘풍운아’로 불렸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는 등의 카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영화 쪽에 손을 대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명필름과 함께 영화 ‘후아유’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감각이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과 함께 개봉시기 등 운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일을 함께했던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광고기획자로 탁월한 감각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했다.

 -생뚱맞게 정치권에서 1년을 보냈다. 떠나는 느낌은 어떤가.

 “행복하다. 눈을 떠보니 1년이 금방 갔다. 내 인생 전체를 압축해 놓은 느낌이 들 정도로 치열했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머리에 빨간 염색물이 다 빠져 있더라. 이젠 진짜 당을 떠날 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지난 4월 총선 당시 한 TV토론에서 ‘새누리당을 지지해 주면 머리를 빨갛게 염색하겠다’고 했고 총선에서 승리하자 그 약속을 지켰다.)

 -인생의 외도를 끝내고 이제는 본업으로 간다고 했는데 광고업계로 돌아간다는 건가.

 “내 본업이라는 게 별다른 게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물건을 팔든,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하든 내가 원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거다. 이제 광고업계에 복귀해 첫걸음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려고 한다.”

 -1년간 정치권에 머물며 ‘의외’(?)의 성적을 거뒀다. 무엇에 매력을 느끼고 어떤 원칙으로 사는가.

 “‘배우려면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우자’는 게 내 신조다. 나와 다른 프레임 속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만날 땐 늘 기분 좋은 자극 받고 설렘을 느낀다. 화양사거리에서 20년간 옥수수를 파는 상인이 한 명 있다. 20년 넘게 똑같은 일을 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즐겁게 살까. 궁금해서 말을 걸어봤더니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더라. 무조건 옥수수만 팔고, 일요일만 쉰다든지 하는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같이 소주도 하고 하면서 가까워졌다. 돌아보면 내가 새누리당에서 일하게 된 것도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 때문이었던 것 같다. ”

 -카피라이터로 이름을 날렸지만 굴곡도 많았다.

 “당에 합류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40대 후반까지 광고계 쪽에서 활동했고 그때는 나름 잘나갔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등 내가 만들었던 광고 문구가 족족 대박을 쳤다. 그러다 욕심을 내서 영어마을 등 문화사업을 벌여봤다. 나름대로 새로운 도전이었고 변신이었는데 결과가 안 좋았다. 속된 말로 완전히 망해버려서 다 잃고 인생의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죽겠다는 생각까지 가졌었다. 지금에야 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는 정말 잔혹했고 인생의 쓴맛을 한꺼번에 맛보았던 암울한 시기였다.”

-어떨 때 가장 힘들었나.

 “나름대로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 해서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광고계에선 나이 먹고 부담스러웠는지 나한테 아무런 눈길조차 안 주고 일도 안 주더라. ‘이젠 내가 퇴물 취급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할 수 없이 2011년 중순부터 광고·문화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후진을 양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변에서 ‘조동원이 이제 먹고살려고 별일을 다하는구나’ ‘50대 중반 다 돼서 그렇게 해봐야 뭐 하나’ 하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가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카피라이터라는 내 직업에 항상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는데, 그런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 안타까웠다.”

-새누리당에 들어올 때가 그 무렵이었나.

 “그렇다. 하지만 제의가 왔을 때 처음엔 거절했다. 성향도 다르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심 새로운 삶에 도전해 볼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정치인도 어떻게 보면 내가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의 사람이 아닌가. 이들과 접해서 일하면서 뭔가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카피라이터 직업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90년대에 한 여자 조수가 들어왔다. 명문대 나오고 지금 말로 스펙도 좋고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 그런데 들어온 지 며칠 안 돼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라고 엄포를 놨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켰다. ‘카피라이터가 최고의 직업이다. 남대문 지게꾼부터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그만큼 내 일에 자부심을 느꼈었다.”

-아이디어가 창의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내 아이디어의 원천은 품속에 있는 큰 수첩과 작은 수첩(주황색·녹색 수첩)이다. 한 달에 대여섯 통씩은 쓰는 거 같다. 잘 때도 머리맡에 놓고 잔다. 뭔가 발상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적어야 하니까. 큰 수첩은 뭔가 의식의 흐름을 적는다고 할까. 생각나는 대로 끊임없이 적고, 그림을 그리고 하는 데 사용한다. 작은 수첩은 기발한 짧은 문구가 떠오를 때 꺼내 든다. 내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걸 적을 때도 있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관찰하면서 새로운 점을 적기도 한다. 이렇게 수첩에 아이디어가 쌓이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활용할 때가 나온다. 수첩이 없었다면 내 아이디어도 없었을 거다.”

 -새누리당 들어올 때 주변에서 비난은 없었나.

 “내 주변엔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뭐 때로 왜 하필 새누리당에 들어가느냐는 말도 들었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내가 담당한 건 정치가 아니라 ‘홍보’라는 업무니까. 비난은 비난대로 받아들이고 일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총선을 앞두고 MBC ‘100분 토론’에 나가고 난 뒤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었다. 당시 민간인 사찰 문제가 이슈였는데 ‘우리 당도 참여정부에서 불법 사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 발언의 근거를 묻는 질문에 ‘저는 모르죠’라고 대답한 게 화근이었다. 내 트위터에 가보면 하루에도 욕이 수십 개씩 쌓여 있었다. 그래도 ‘겸손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욕하는 글에도 성실히 다 댓글을 달아줬다. 그랬더니 비난여론이 어느새 다 사그라지더라. 지금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갈등이나 분열 같은 것들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년간의 시간이 성공일지 실패일지를 가려줄 대선 당일엔 뭐 하고 보냈나.

 “그날 예상외로 너무 떨리고 조마조마했다. 오전엔 박 당선인이 밀린다는 소문도 돌고 해서 많이 긴장됐다. 그래서 일부러 오후 6시에 시작하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예매했다 휴대전화도 꺼놓고 영화를 봤다. 결과는 이미 나와 있을 테니 출구조사 발표는 보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영화 끝나고 2시간 뒤에 나오니 박 후보가 앞서고 있더라. 기뻤다. 내 역할도 끝났구나 하는 묘한 느낌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때부터 당과 ‘이별’할 준비를 했었는지 모르겠다.”

 인터뷰를 마친 뒤 조동원 전 본부장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염색물이 빠지니 사람들이 못 알아보더라. 내 이미지가 사람들 머릿속에 ‘빨간 머리’로 고정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못 알아보니 내심 아쉬우면서도 내 전략은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에서 내가 했던 일은 사람들 마음속에 빨간색을 심는 일이었다. 이젠 당을 떠나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기분 좋게 훔치는 일을 하고 싶다.”

손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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