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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동냥 하다 연설가로… 노예 출신 ‘셀프메이드 맨’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1m 80cm가 훨씬 넘는 훤칠한 키, 확신에 찬 강렬한 시선, 예언자적 카리스마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셀프메이드 맨(self-made man)’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셀프메이드 맨은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이다. 물려받은 재산 없이 가난과 역경을 스스로 이겨냄으로써 집안을 일으키고 재산을 모은 사람 인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셀프메이드 맨의 원조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중 한 사람인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다. 수많은 자수성가형 위인이 19세기 미국에서 태어났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 ‘석유왕’ 존 록펠러(18 39~1937), ‘자동차왕’ 헨리 포드(1863~1947),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1847~1931)과 같은 인물들이다.

연설할 때는 군왕 같은 위엄
미국 셀프메이드 맨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은 해방노예 출신인 프레더릭 더글러스(1818~1895)다. 그는 19세기 노예제 폐지 운동의 주역이다. 더글러스는 『셀프메이드 멘(Self-Made Men)』(1872)이라는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더글러스는 행운을 믿지 않았다. 오로지 준비와 기회의 만남이 안겨다 주는 성공을 믿었을 뿐이다. 그에게 준비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호메로스, 플라톤, 셰익스피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을 소화했다. 독서를 통해 19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가 중 한 사람이 됐다. 더글러스가 연설할 때에는 군왕 같은 위엄이 있었다. 그 또한 19세기 미국이 배출한 ‘왕’이었다.

더글러스는 마틴 루서 킹(1929~1968), 맬컴 X(1925~ 1965)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흑인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킹과 X의 롤 모델이었다. 더글러스의 이름을 딴 학교도 많다. 그의 이름이 붙은 학교수는 워싱턴·제퍼슨·링컨에 이어 4등이다.

더글러스는 메릴랜드주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그곳 흑인 노예들의 처지는 남부보다는 나았다. 그들은 남부로 언제 팔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는 백인 노예주인 에런 앤서니로 추정된다. 어머니는 흑인 노예 해리엇 베일리였다. 더글러스는 할머니 손에 컸다. 어머니는 가끔씩 그를 보러 왔다. 눈을 떠보면 어머니는 사라진 다음이었다. 어머니는 1826년 더글러스가 7세 때 사망했다.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더글러스는 1826년 볼티모어로 머슴살이를 하러 갔다. 안주인 소피아 올드는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었다. 어머니의 정을 느끼게 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1827년 더글러스는 소피아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법으로 금지된 일이었지만 소피아는 더글러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편 휴 올드가 반대했다. 흑인 노예가 글을 알게 되면 도망치게 된다는 게 남편의 판단이었다.

소피아에게 글을 배울 수 없게 되자 더글러스는 백인 아이들에게 글동냥을 했다. 인쇄된 것은 닥치는 대로 모두 읽었다. 1831년 12살 때 어렵게 모은 돈으로 『미국 웅변가(The Columbian Orator)』(1797)라는 읽기·말하기 책을 샀다.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은 책이었다. 이 책으로 몰래 웅변을 연습했다.

1830년대 초반, 글을 깨친 더글러스는 다른 흑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1831년 신문을 읽다가 노예제 폐지 운동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휴 올드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 1838년 선원으로 위장한 더글러스는 자유주(州)인 뉴욕으로 도망갔다. 자유주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를 사용하지 않던 주다. 같은 해에 5년 연상인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 애너 머리(1813~1882)와 결혼해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에 정착했다. 노예사냥꾼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성을 더글러스로 바꿨다.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1771~1832)의 시 호상(湖上)의 미인(The Lady of the Lake)에 나오는 이름이었다.

준비된 그에게 기회가 왔다. 1841년 뉴베드퍼드에서 개최된 노예제 폐지 모임에서 연설할 기회가 온 것이다. 흑인 입장에서 노예제폐지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당시엔 그럴 능력이 있는 흑인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흑인들은 시민이 될 능력이 없다’며 노예제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더글러스는 살아 있는 반증이었다. 미국노예제반대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1833~1870)를 설립한 윌리엄 개리슨(1805~1879)이 더글러스를 주목했다. 노예제반대협회는 더글러스를 연설인으로 고용했다.

더글러스는 1845년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의 변설이 너무 뛰어나 ‘노예 출신이 아닌 것 같다’는 풍문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자서전이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이나 『공산당 선언』(1848)에 버금갔다. 그는 1855년에도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완결편은 1882년에 나온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과 시대(Life and Times of Frederick Douglass)』다.

더글러스는 승승장구했다. 그를 따라 올 연설가는 없었다. 미국에서 초기 여권운동을 주도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1815~1902)은 더글러스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아프리카 왕자와 같았으며, 그의 격노는 장엄했다.” 1845~1846년 노예제 폐지 운동의 국제연대를 위해 영국·아일랜드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 가는 곳마다 숨 막힐 정도로 많은 청중이 운집했다. 감동한 영국 노예제폐지 운동가들은 아직 노예주와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더글러스를 위해 150파운드를 모금했다. 1846년 더글러스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됐다. 1847년 더글러스는 뉴욕주 로체스터로 이주해 ‘노스 스타(North Star)’라는 노예제 철폐 운동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지식은 예속에서 자유로 가는 길”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이 1854년 미 공화당을 창립했다. 더글러스는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다(1930년대 대공황, 1960년대 케네디·존슨 행정부를 거치며 흑인 유권자들이 민주당으로 전향하기 전까지 흑인 유권자들은 공화당의 표밭이었다). 1860년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돼 남북전쟁(1861~1865)을 촉발했다. 링컨 대통령의 자문위원이 된 더글러스는 북군을 위해 흑인 병사들을 모집했다. 승리에 기여해야 떳떳하게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모집한 병사들로 구성된 매사추세츠 제54보병연대는 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였다. 더글러스의 아들 둘도 군복무를 했다. 남북전쟁 당시 18만 명의 흑인이 해방을 위해 싸웠다.

노예해방령(1863)을 거쳐 헌법 수정 제13조(1865)로 노예제가 폐지됐다. 새로운 미국에서 더글러스는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상당히 비중 있는 관직을 맡았다. 컬럼비아 특별구 연방재판소 집행관(1877~1881), 공훈기록관(1881~1886), 아이티 주재 미국 공사 겸 총영사(1889~1891)를 지냈다. 1872년에는 군소 정당이긴 하지만 평등권리당이라는 정당이 허락도 없이 더글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어쨌든 미국 최초의 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1877년에는 그의 옛 노예주를 만나 화해했다. 1878년에는 방이 20개 있는 대저택을 구입했다.

더글러스는 온건했다. 폭력에는 당연히 반대했다. 당시 미국 헌법이 노예제에 찬성하는 문헌인지, 반대하는 문헌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더글러스는 1851년부터 미국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문서라고 주장했다. 미국을 수립한 기초 문헌들을 ‘타도’가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평생 흑인의 권리를 위해 싸웠지만 흑인들에게는 이렇게 역설했다. “백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흑인들도 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지식은 예속에서 자유로 가는 길이다”라며 교육을 통한 흑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주창했다.

첫 번째 아내 애너는 평생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더글러스는 백인 여성들과 정분 나는 일이 많았다. 1856년 독일 언론인 오틸리에 아싱과 친구가 됐다. 아싱은 더글러스의 자서전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둘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거리를 산책했다. 둘의 관계는 28년간 지속됐다. 더글러스는 그러나 아내 애너를 버리지 않았다. 아내가 사망하자 더글러스는 우울증에 빠졌다. 강연 활동 때문에 집에 잘 붙어 있지도 못했기에 죄책감이 컸을 것이다.

2년 후 더글러스는 20세 연하인 백인 여성운동가 헬렌 피츠와 결혼했다. 소식을 들은 오틸리에 아싱은 몇달후 파리에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했다. 더글러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싱은 유방암에 걸렸다고 했다.

더글러스는 1895년 2월 20일 한 여성운동모임에서 연설했다. 더글러스는 미국 여성운동사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이다. 저녁에 더글러스는 그날 연설에 대해 아내와 이야기하다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콘돌리자 라이스(1954년생) 전 국무장관의 아버지는 평소 이런 말로 딸을 교육했다고 한다. “백인 아이들과 동등해지려면 2배를 더 잘해야 하고 그들을 앞서려면 3배를 더 잘해야 한다.”

더글러스는 5명의 자식을 뒀으나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서인지 자식들이 신통치 않았다. 더글러스는 아마 라이스의 아버지와 같은 말을 후세 흑인들에게 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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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