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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규 칼럼] 박근혜 당선인과 계영배

12월 19일 밤 11시쯤, 당선이 거의 확정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삼성동 자택을 떠나 당사로 향할 때 나는 신당동으로 갔다. 고박정희 대통령의 사저 풍경은 어떨까 싶어서다. 그 집에서 박 대통령 가족은 1958년 5월부터 61년 8월까지 살았다. 5·16을 계획하고 지휘했으며, 5월 15일 밤 10시 ‘거사’를 위해 부인에게 “가방 속 권총을 달라”고 했을 때 부인 육영수는 “근혜 숙제를 봐주고 가시라”고 했던 곳이다. 그때 아홉 살 국민학생 근혜는 진짜로 공부하던 중이었다. 어찌됐든 역사의 현장인 그곳과 주위는 적막했다. 겨울 삭풍에 대문 앞 태극기만 휘날렸다. 그 시간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 대통령 생가는 잔칫집이었다. 왜 그런 차이가 날까.

서울의 냉랭함 때문일 것 같다. 박 당선인이 전국에서 51.6% 대 47.9%로 이겼지만 표차이는 불과 108만 표였다. 간발의 승리다. 거꾸로 서울에선 수십만 표를 졌다. 신당동 옛 사저가 포함된 중구에서도 48.8%대 50.7%로 졌다. 그래서 박 당선인이 “대탕평을 하겠다” “문재인 후보님의 국민 위한 마음을 늘 새기겠다”며 아우른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패배 진영은 벼를 것이다. 21일 밤 2030세대 전용 인터넷 사이트를 들렀더니 소위 ‘멘붕’ 천지였다. 20일 새벽부터 울고, 통음했다는 건 예사다. 한 젊은 주부는 너무 마셔 아이들 밥도 못 챙겼다고 한다. 뉴스가 싫어 포털도 옮기고 ‘근혜 보기 무섭다’며 TV도 안 켠단다. 곧 병원이 민영화돼 맹장 수술비가 오르니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설도 돌아다닌다. “우린 노인네들 먹여살리려 태어났느냐” “50대의 안보 타령이 혐오스럽다”는 울분도 보인다. 급기야 경상도 상품 불매, 노인 용돈 끊기, 국민방송 개국 같은 아이디어도 속출한다. 그들의 말로 그들의 심리를 표현하면 ‘마징가Z가 아수라 백작에게 패하고’ ‘배트맨이 조커에게 죽고’ ‘로봇태권V가 부서진’ 상태다. 그런 분위기가 문 후보를 지지한 1469만 명 전부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광우병 시위’ 때처럼 빈틈만 보이면 공격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지점에서 당선인의 성향을 돌아보게 된다. 그가 직접 쓴 책들을 보면 내면에 ‘약속, 소신, 성실’ 같은 가치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유권자 거의 절반은 이를 꼭 높게 평가하진 않는다. 당선인에게 내재된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의 면면도 생각하게 된다. ‘선거의 여왕’을 거쳐 대선에서 승리한 능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DNA의 도움이겠지만 그 힘은 자칫 ‘독재’ 비난을 부를 수 있다. 국정 운영을 할 땐 어머니의 장점이 더 많이 필요할지 모른다. 당선인이 쓴 『나의 어머니 육영수』를 보면 어머니는 당선인의 영원한 롤 모델이다. 1968년 여름, 가뭄에 타들어가는 전남을 조용히 찾은 육 여사는 물이 안 올라오는 양수기 발판을 혼자 밟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기억하는 당선인은 득표율 낮은 지역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을 다독이는 행보를 늘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를 곱게만 봐줄 정치 지형이 아니다. ‘고난을 벗 삼고 진실을 등대 삼는’ 고고함이나 성실·소신 같은 가치가 더 이상 최고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예(禮)가 존중되지도 않는다. 현직 대통령의 악수를 거부했다고 자랑하는 시대다. 선의에 관계없이 시비와 공방이 따르고 정치 대결이 촉발될 것이다. 그게 답답하다고 89년 12월 1일 일기에 썼듯 ‘나의 생은 한마디로 투쟁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식으로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서툰 조언 대신 당선인도 잘 아는 ‘계영배(戒盈盃)’를 상기하고 싶다. 아무리 부어도 7할만 유지하는 잔, 계영배. ‘과함을 경계한다’는 뜻이라며 당선인이 남에게 선물을 줄 때 애용해 온 품목이다. 지금까진 남에게 줬지만 종종 스스로에게 이 잔을 선물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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