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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길 칼럼] 낙선자를 위하여

김수길
주필
당신은 승복 연설 원고를 준비하셨습니까. 정성 들여, 진정을 담아, 글 한 줄 단어 하나까지 세심히-.

 당신은 지금 대한민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시점에 가장 중요한 자리에 섰습니다. 당선자보다 당신이 더 중요합니다. 고비 고비마다 굴곡을 넘어 여기까지 온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우르며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주저앉느냐가 낙선자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은 패배자가 아닙니다. 당신을 지지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유권자가 있습니다. 한 명뿐이어야 할 대통령을 뽑으려니 할 수 없이 둘 중 한 명을 선택했을 뿐, 당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많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지지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들 낙담하고 절망하며 돌아서기를 원합니까. 당신이 통합과 미래를 얘기했을 때 귀 기울여주었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금 분열과 과거에 머무르기를 원합니까. 아쉽게 낙선한 당신의 진정 어린 승복과 호소가, 당신과 함께 아쉬워하는 지지자들을 대통합의 장으로 이끌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우리는 이미 많은 발전과 축적을 이뤘다고 봅니다.

 근거 없는 흑색선전이 여전히 오가긴 했지만 5년 전, 10년 전 대선 때와 비교해보면 어른스럽다 할 정도로 별 영향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김대업이나 BBK에 비하면 이번 국정원 여직원 소동은 사소한 축에 듭니다. 또 선거 기간 내내 두 후보 모두 참모들이 부지런히 준비해 오는 상대방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자료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죽 듣고 있었습니다. 서로 대통령 후보로서의 품위를 지켰고 예의를 차렸습니다. 두 후보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부터를 위해 매우 소중합니다.

 정책 차별성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좋게 볼 면도 있습니다. 좌우의 정책이 상당 부분 수렴해가며 보육 등 복지 확대에 대해서는 큰 방향에서의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셈이니까. 앞으로 여야의 합의가 절실한 일이 많은데, 설마 선거 후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뒤집지는 못할 터이니까.

 경쟁적으로 복지 씀씀이를 공약하느라 복지 재원 마련 문제는 매우 허술한 것도 서로 오십보백보입니다. 이 문제 또한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양쪽 다 무리했다는 것을 내심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그렇지 않아도 대선 전에 이미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대연정이나 거국내각 외에는 길이 없다는 의견이 꽤 나왔습니다. 당선자 측에서 심사숙고할 문제지만 낙선자 측도 손바닥을 마주칠 용의와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낙선자 당신의 진정 어린 승복과 호소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당선자는 팔자가 험한 사람입니다. 고민하고 결단하고 비난 받고 책임져야 합니다. 당신은 이번에 크고 무거운 짐을 질 뻔했습니다. 낙선함으로써 그런 짐을 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당신이 훌훌 털고 모든 짐을 벗은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 후보로서 진정으로 나라의 미래를 생각했다면 두 사람 다 같이 공약했던 포용과 통합을 위해 낙선자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든 물러나지 않든 선거가 다시는 증오의 진영 대결이 되지 않도록 이끌 엄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성공한 낙선자’가 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성공한 대통령’을 만드는 데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저성장의 늪 속에서 양극화·복지 등 온갖 문제를 풀어가려면 정치적 타결로밖에는 실마리를 풀 수 없음을 이제 다들 알았습니다. 대기업·정규직은 물론 모든 권력화된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동력과 질서가 자리 잡을 때까지 다 함께 살아남으려면 일단 정치적 타결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당장을 위해 미래를 당겨다 탕진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것입니다. 계층만이 아닌 세대 간의 정치적 타결입니다. 그런 정치적 타결을 위해 과거 어느 때보다 낙선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선자가 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 갈 비전을 구현하겠다고 했습니다. 아쉽게 당선자가 되지 못했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낙선자로서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유력 대통령 후보로 쌓은 지혜·경륜·통찰을 포용과 통합을 위한 에너지로 모아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승복 연설을 기대합니다. 정성 들인, 진정을 담은, 글 한 줄 단어 하나까지 세심히 신경 쓴-.

김수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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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