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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박근혜와 문재인이 승리하는 날

전영기
논설위원·JTBC 뉴스9 앵커
대선은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액션영화 한 편 같습니다. 온 세상이 두 패로 나뉘어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머리를 짜내고 조직을 동원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장면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이 영화, 이틀이면 끝납니다. 그때까지 절정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십시오. 대선에서 일상으로 복귀할 땐 승복, 박수, 배려, 관용 같은 미덕들을 가져와 주십시오. 거짓, 선동, 복수, 공격 같은 액션은 가져오지 마셔요.

 인물의 스케일이란 측면에서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는 과거에 비해 떨어집니다. 선거가 이틀 남았을 때면 대중의 입에서 어느 한쪽 얘기가 집중적으로 나오고, 그 인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김영삼의 사명(1992년), 김대중의 비전(97년), 노무현의 꿈(2002년), 이명박의 일(2007년) 같은 것 말이죠.

 박근혜와 문재인은 실무적이고 사무적인 후보들입니다. 역대 당선인들이 신화적이거나 거인의 느낌을 줬던 것과 대조적이죠. 이는 두 사람이 자기 매력에 호소하는 선거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최선 아닌 차선을 뽑을 뿐’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라는 기류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양쪽 진영은 상대 후보가 당선하면 안 되는 수백 가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핏대를 올리는 내용 세 가지를 각각 추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봤습니다.

 ▶박근혜가 당선하면 안 되는 이유=①특권과 기득권에 둘러싸인 낡고 수구적인 보수세력이다 ②이명박 정부의 실패,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 ③박정희의 딸, 소통이 어렵고 민주적 리더십이 빈약하다.

 ▶문재인이 당선하면 안 되는 이유=①핵미사일 발사에 성공한 김정은 북한정권에 질질 끌려다닐 것이다 ②참여정부의 폐족(廢族), 분열과 증오를 조장하는 친노세력이다 ③한·미FTA, 제주해군기지 정책, 말을 바꾼 거짓 세력이다.

 사실과 비난이 혼재해 있고, 이성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바가 큰 체크리스트입니다. 그래도 여기까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2월 19일 밤, 승자는 패자를 지지한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헤아려야 할 겁니다. 승리에 취해 패자 진영을 돌아보지 못한 당선인은 여지없이 통치의 실패를 맛보곤 했습니다. 자기에게 표를 찍지 않은 50% 이상의 국민, 그들의 한과 응어리, 얽히고설킨 마음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는 데 분노의 체크리스트가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환상과 공포,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심리적 경향입니다. 주관적 정의감이나 자기 연민이 지나쳐 나타나는 일종의 병적 증상이죠. 저는 책임 있고 영향력 있는 분들이 민주주의의 기쁨인 선거를 무슨 죽음의 의식(儀式)처럼 끌고 가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근혜 캠프의 김중태(72) 국민대통합부위원장은 광화문 유세에서 “낙선한 문재인 후보가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 찾아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를 외치며 부엉이 귀신을 따라 저세상에 갈까 걱정된다.”(12월 8일)고 발언했답니다. 선거의 당락과 사람의 생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김씨는 문 후보가 걱정된다고 했지만 저주를 한 셈입니다.

 문재인 후보 측의 정혜신(49) 국민연대 공동대표는 백범기념관에서 “대선은 목숨이다.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은 그 순간, 죽을 사람들이 번호표 받고 대기하고 있다고 느낀다. 부시 전 대통령의 당선 순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라크에 나가 죽을 것이 결정됐듯 많은 사람들이 그런 순간의 직전에 왔다고 생각한다.”(12월 6일)고 말했습니다. 대선은 목숨을 건 전쟁이 아닙니다. 목숨보다 필요한 건 승복과 배려입니다. 부시의 당선과 이라크전의 젊은 죽음을 연결시킨 건 심령술입니까.

 주관적 체험에 사로잡힌 병든 언어들을 주의합시다. 이런 게 대선 뒤 일상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가로막습니다. 잔치가 끝난 뒤 챙겨야 할 건 무엇일까요? 정겹게 지냈던 친지와 동료들, 선거과정에서 얼굴을 붉혔던 생각의 충돌과 격정의 대화들을 상기해 봅시다. 한국인은 2012 대선을 통해 큰 것을 얻었습니다. 상대 진영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알게 된 거죠. 당선인은 낙선인의 생각을 흡수하고, 낙선인은 당선인을 축하해 주십시오. 당선 세력은 패배 세력의 감정을 배려하시고, 낙선 세력은 당선 세력에게 승복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박근혜·문재인이 함께 승리하는 날은 이렇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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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