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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마다 이름 붙여 색깔 있는 여자로 변신시키죠”

대한민국 트렌드는 강남에서 시작된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의 부티크는 대부분 강남을 근거지로 하고, 헤어 디자이너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숍 역시 청담동에 자리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활동 영역 또한 강남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이 제안하는 것들은 강남의 소수 매니어와 셀러브리티에 의해 채택돼 유행으로 번져나가며 대중화의 길을 걷는다. 강남 서초 송파&은 강남 트렌드 세터들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는 트렌드란 무엇인지, 무엇이 트렌드를 움직이는지 들어봤다. 첫번째 인물은 슈즈 디자이너 김미선 대표다.

글=하현정 기자 , 사진=김경록 기자

슈즈 디자이너 김미선 대표가 신사동에 있는 슈즈 갤러리에서 그가 만든 구두를 소개하고 있다.


#신발 신은 고객들, 그 이름에 따라 분위기 변해

‘힐다’는 까다롭지 않지만 디자이너 같은 섬세한 감성을 가진 여자다. 무난해 보이지만 세련되고 시크하다. ‘베일리’는 차분한 성격에 밝고 사랑스러운 여자다. 온순한 성격이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의견을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도 있다. ‘헤더’는 세련되고 쿨한 여자다. 모험을 즐기기도 하고 트렌디한 것도 좋아하는 명랑한 성격이다.

세 캐릭터의 이름은 모두 슈즈 브랜드 SYNN의 제품명이다. 알파벳 약자와 넘버들로 열거된 다른 브랜드의 제품명과는 다르다. SYNN의 대표이자 슈즈 디자이너인 김미선(36) 씨는 구두를 만들면서 그 구두에 맞는 여자도 만든다. 물론 머릿속에 말이다. 매 시즌 80가지 이상의 제품이 탄생한다. 구두마다 새로운 이름을 짓는 일은 까다롭고 어렵다. 처음부터 이름이 떠오르는 디자인이 있는가 하면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해외 고전 문학과 영어 사전까지 동원해 어울리는 이름을 고민할 때도 있다.

예쁘고 세련된 이름의 효과는 청담동 매장에서 한층 빛을 발한다. 신발을 고르는 고객들의 모습과 표정이 구두의 이름에 맞춰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심플한 펌프스인 ‘제니스’를 신으면 이름처럼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거울을 보는 표정도 세련되고 기품이 넘친다. 웨딩슈즈 ‘로에나’를 신은 예비 신부는 로맨틱한 감성을 가득 담은 순수한 신부가 된다.

김 대표는 슈즈 디자이너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슈즈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한 1세대 디자이너다. 그가 만든 구두는 우아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스타일리스트 김성일 같은 패션 전문가와 탤런트 김남주, 김희선 등 패셔니스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피겨 요정 김연아가 공식 석상에서 SYNN의 버클 펌프스를 신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결혼한 가수 출신 탤런트 서지영은 웨딩 촬영과 결혼식 때 신을 슈즈 디자인을 김 대표에게 맡겼었다. 김 대표는 웨딩슈즈에 대한 편견을 깨고 블루, 핑크 컬러의 웨딩슈즈를 완성했고 서씨는 너무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덕분에 신부들 사이에 한 때 컬러 웨딩슈즈 바람이 불기도 했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아이두 아이두’에서는 자문으로 참여해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전한 바 있다.

# 인형 구두도 손수 만들던 소녀 … 구두가 좋았다

어릴 적 인형을 좋아했던 소녀는 인형마다 다른 직업과 환경을 정하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을 짓는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자신이 만든 제품에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형에 대한 애정은 인형 옷으로 옮겨갔고 인형 옷에 대한 관심이 가방과 신발로 확대됐다. 옷을 만들면 꼭 의상에 맞는 가방과 슈즈를 코디네이션 하곤 했다. 신발만은 빼 놓지 않고 챙겼다. 예쁜 인형 구두를 찾기 위해 문방구를 샅샅이 뒤지다가 다른 동네 문방구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 손엔 늘 인형 구두 세트가 들려 있었다. 그럼에도 인형 구두는 늘 부족했다. 결국 인형 옷을 만드는 것처럼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구두를 만드는 일은 유년 시절 놀이로 시작됐다.

스무 살, 처음 구입했던 7cm의 브라운 컬러 펌프스는 신는 순간 예쁜 여자가 될 거라는 기대를 무참히 져버렸다. 발가락 뒤꿈치에는 물집이 잡혔고 발바닥도 욱신거렸다. 허리와 무릎이 시큰거려 밤새 끙끙 앓아야 했다. 이후 여러 높이의 굽, 다양한 라스트의 신발을 신으면서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졸업반이 돼서야 내 발에 맞는 슈즈가 어떤 것인지 찾게 됐다. 그 시절 여러 신발을 신어본 경험은 디자이너가 된 지금 무척 유용한 자산이다.

# 구두에는 마술 같은 힘이 있다

왜 그렇게 구두가 좋았을까. 김 대표는 “여자의 구두에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구두 하나로 여자가 당당해지기도 하고 초라해지기도 하잖아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도 빨간색 하이힐 하나면 충분히 화려하고 섹시한 느낌을 낼 수 있죠.” 누군가에게 결심을 전하러 갈 때, 9cm의 하이힐은 그를 한층 더 당당해 보이게 한다. 평소 신지 않던 오렌지 컬러 구두는 힘든 일상에 활력을 준다. 그날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는 것, 바로 구두다.

 김 대표는 겉과 속이 같은 구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겉모양에 매료되어 샀는데 막상 신었을 때 불편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구두는 겉과 속이 다른 구두다. 편안한 착화감과 아름다운 디자인이 잘 어우러진 구두가 겉과 속이 같은, 좋은 구두다.

 디자인은 아름답지만 불편해 잘 신지 않게 되는 구두는 필요 없다. “구두를 만들 때 좋은 가죽을 선택하고 좀 더 편안하면서도 더 세련돼 보이는 라스트를 연구하고 높은 굽에도 안정감과 균형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디자이너는 미묘한 차이라도 신경을 써서 디자인한다. 디자인이 같아 보여도 토크레비지(발가락 골)가 조금 보이느냐 많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에 따라 느낌의 차이가 크다. 디자인을 할 때 굽이나 전체 실루엣에 크게 신경을 쓰기 때문에 만들 때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구두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 콜레보레이션 작업 통해 다양한 시도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만큼 구두에 대한 김 대표의 집중력은 상상 이상이다. 얼굴은 기억을 못했는데 구두를 보고 ‘아, 만난 적이 있구나’ 싶은 사람도 종종 있다.

 “평범한 블랙 펌프스라도 앞 코 모양과 굽 높이, 발등을 감싸는 라인의 모양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나죠. 낮은 굽의 신발을 보면서 ‘많이 돌아다니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캐주얼 하지만 여성스러운 점을 강조하고 싶어하는구나’ 등 어렴풋이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해보고 짐작해보기도 하죠. 그렇게 하면 얼굴보다는 신발로 그 사람이 기억될 때가 많아요.”

의상과 달리 디자인에 있어 한정적인 범위가 있는 구두를 매 시즌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트렌드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아이디어가 고갈됐다고 느껴졌을 때 김 대표를 리프레시 시켜주는 것은 여행이다. 꼭 보고 싶은 해외 전시나 매장, 쇼핑몰의 디스플레이 등은 그를 긴장하게 하고 자극하기도 한다.

 다른 업계 전문가들과 협업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지난 해 문을 연 슈즈 갤러리 ‘갤러리 SYNN’에서 콜레보레이션 전시회를 열었었다.

# 멋진 구두는 좋은 여자가 신는 것

‘멋진 구두’는 ‘좋은 여자’가 신는 구두다. 좋은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인생의 주체가 돼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자를 말한다. 커리어 우먼일 수도 있고 아이들을 키우는 평범한 주부일 수도 있다.

동네 슈퍼에서 만나는 앞집 여자일 수도 있다. 외모가 예쁘고 훌륭한 여자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하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의 여자라도 그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좋은 여자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 있게 사는 그런 여자들이 김 대표가 만드는 구두를 빛나게 해준다. 그들이 신는 구두는 모두 같지 않다. 섹시한 하이힐일 수도, 청순한 플랫 슈즈일 수도 있다. 매니시한 옥스퍼드이거나 단정한 로퍼일 수도 있다. 어떤 모양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빛이 나는 구두는 배우에게 신겨져 브라운관에 등장하기도 하고 청담동의 카페에서 멋스럽게 앉은 여성들의 발에 신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슈즈는 유행이 된다.

 김 대표는 ‘여자를 예뻐 보이게 하는 구두’를 만들고자 한다. “눈으로 봤을 때 예쁜 구두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신었을 때 다 예쁘지 않죠.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맞는 예쁜 구두가 있잖아요. 그 신발의 이미지와 신는 사람의 이미지가 잘 연결이 돼야만 가능하죠. 물론 발의 모양과 다리의 모양, 패션 스타일도 맞아야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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