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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기다림의 자세, 그리고 장독대 위의 정화수

이원규
시인
어느새 어머니 돌아가신 지 만 15년이 되었다. 수절 35년의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묻고는 곧바로 빈손으로 지리산에 왔다. 이승에 없는 어머니의 세월과 지리산 입산 고아의 세월이 다르지 않았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처럼 나의 어머니 또한 밤마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모았다.

 음력 시월보름의 섬진강 달빛을 바라보다 문득 나도 정화수를 올리고 싶었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스스로 반성하며 얼른 집으로 돌아와 대숲 아래 오래된 장독대 위에 차고 맑은 물 한 사발을 올렸다. 언제나 ‘돌아온 탕자 같은’ 막내를 위해 노심초사 수없이 정화수를 올렸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뒤늦게 극락왕생을 빌었다. 일생 동안 이를 악물고 살다 어금니마저 다 무너지는 바람에 일찍이 끼웠던 어머니의 틀니가 지리산까지 찾아와 정화수 위에 환한 달빛으로 내려앉았다.

 그날 밤 이정록 시인의 시집 『어머니 학교』를 읽으며 한없이 부럽고 부끄러웠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학교의 동창생’이라며 일흔세 살 어머니의 말씀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어머니’와 ‘시인 어머니의 아들’이 공동 창작한 셈이다. 이미 이전의 시집인 『의자』의 표제작도 어머니가 써준 셈인데,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처럼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절창이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사랑’이라는 시가 눈길을 끌었다. ‘편애가 진짜 사랑이여/ 논바닥에 비료 뿌릴 때에도/ 검지와 장지를 풀었다 조였다/ 못난 벼포기에다 거름을 더 주지/ 그래야 고른 들판이 되걸랑’이라며 편애야말로 오히려 진정한 모성(母性)임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옛말과 일맥상통하는 선언이 아닌가. 일등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참으로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문득 10여 년 전에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던 기억이 떠오른다. 민족의 영산이자 모성의 산인 지리산에서 대립과 갈등의 한국 현대사에서 희생된 그 모든 이를 위해 달궁에서 첫 위령제를 지냈다. 좌익과 우익, 그리고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를 희생자로 규정하고, 동서갈등과 관광개발 등으로 희생된 유무정의 뭇 생명까지 모두 아우르는 범종교, 범국민적인 행사였다.

 바로 그때의 핵심 슬로건은 ‘토벌대 큰아들과 빨치산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20세기 냉전 이데올로기를 넘어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모성의 생명평화’를 선언했다. 당시 김지하 시인도 3년간의 ‘지리산 공부모임’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발언을 보면 사상적으로 퇴행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탓하는 게 아니다. 여성성의 숭고미인 모성성을 너무 편의적으로 축소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시대의 큰 어른들이 하나 둘 스러지는 ‘사상적 사막화’가 서글플 뿐이다.

 이제 ‘무조건적인 희생이 강요되는 어머니상’은 옛말이 되었다. 『어머니의 탄생』이라는 책은 ‘모성의 신화’에 반기를 든다. ‘좋은 어머니’ 되기와 ‘야망’이 양립할 수 없다는 낡은 사고방식에 종말을 고하고, ‘모성과 야망은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 한 마리 토끼’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당최 엄두도 못 냈을 일이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위대한 모성성은 사실 남녀 구분을 뛰어넘는 상위 개념이다.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끝내 잃지 말아야 할 인간존엄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모성은 ‘아픈 손가락’을 자꾸 깨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안 아플 수 있는 공통분모’ 혹은 ‘덜 아픈 교집합’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의 지난한 현실이나 분단시대의 질곡과 불행이 60년 지나도록 잘 풀리지 않는 것 또한 서로 불통의 차집합만 내세웠기 때문이 아닌가.

 이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두들 노심초사하고 있다. 지리산 반달곰은 반달곰의 자세로, 섬진강 쏘가리는 쏘가리의 자세로, 천년의 주목은 주목의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하필이면 15년 전 대통령 선거일이 내 어머니의 장례식 날이었다. 이번 선거일도 바로 어머니 제삿날 하루 전이다. 그날까지 어머니처럼 정화수를 올리는 것이 내 기다림의 자세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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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